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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105

조선을 망친 명성황후 민비를 찬양하는 것이 진짜 역사 왜곡이다.

[들어가기전] 최근 한, 중, 일 모두 역사 왜곡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중 가장 한심한 것이 바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역사 왜곡이다. 중국과 일본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려들지만, 한국만큼은 나라를 망치겠다는 신념으로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시간이 되면 계속해서 잘못된 역사와 인물에 대한 글을 써볼까한다. 첫 번째 한국사 인물로 10여년이 넘도록 조선의 국모로 추앙받고 있는 명성황후 민비에 대한 생각을 적어 본다. 그리고 명성황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위키백과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참고: 위키백과 => 명성황후 ] 조선을 망친 명성황후 민비를 찬양하는 것이 진짜 역사 왜곡이다. (드라마 역사 왜곡의 대표적인 사례 KBS 드라마 명성황후) 내가 어린시절 국사 시간에는 명성황후를 민비로 ..

역사/인물 2014.01.12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20 끝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 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 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 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맛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의 정치 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을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 나라의 독특한 좋은 제도를..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9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그러나 모든 계급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이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 중에서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었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었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쳤다. 우리 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직권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8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근래에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 나라를 어느 큰 이웃 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 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 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댄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7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세 번째 길로 나는 윤봉길 의사의 본댁을 찾으니 4월 29일이라, 기념제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나는 일본 동경에 있는 박열 동지에게 부탁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 열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 오게 하고,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는 날 나는 특별 열차로 부산까지 갔다. 부산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분의 유골을 모신 열차가 정거하는 역마다 사회, 교육 각 단체며 일반 인사들이 모여 봉도식을 거행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자 유골을 담은 영구를 태고사에 봉안하여 동포들의 참배에 편케 하였다가 내가 친히 잡아 놓은 효창공원 안에 있는 자리에 매장하기로 하였다. 제일 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남기고 그 다음에 세 분의 유골을 차례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날 미국인..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6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이 모양으로 연이어 오는 폭격에 중경에는 인명과 가옥의 손해가 막대하였으며 동포 중에 죽은 이는 신익희씨 조카와 김영린의 아내, 두 사람이 있었다. 이 두 동포가 죽던 폭격이 가장 심한 것이어서 한 방공호에서 4백명이니 8백명이니 하는 질식자를 낸 것도 이때였다. 그 시체를 운반하는 광경을 내가 목도하였는데 화물자동차에 짐을 싣듯 시체를 싣고 달리면 시체가 흔들려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고 그것을 다시 싣기가 귀찮아서 모가지를 매어 자동차 뒤에 달면 그 시체가 땅바닥으로 엎치락 뒤치락 끌려가는 것이었다. 시체는 남녀를 물론하고 옷이 다 찢겨서 살이 나왔는데 이것은 서로 앞을 다투어 발악한 형적이었다. 가족을 이 모양으로 잃어 한 편에 통곡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편에는 방..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5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호종남 장군은 출타하여서 참모장만을 만나고 성주석 축소주 선생은 나와 막역한 친우라 이튿날 그의 사저에서 석반을 같이하기로 하였다. 성당부에서는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개최한다 하고 서안 부인회에서는 나를 환영하기 위하여 특별히 연극을 준비한다 하고 서안의 각 신문사에서도 환영회를 개최하겠으니 출석하여 달라는 초청이 왔다. 나는 그 밤을 우리 동포 김종만씨 댁에서 지내고 이튿날은 서안의 명소를 대개 구경하고 저녁에는 어제 약속대로 축 주석 댁 만찬에 불려갔다. 식사를 마치고 객실에 돌아와 수박을 먹으며 담화를 하는 중에 문득 전령이 울었다. 축 주석은 놀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중경에서 무슨 소식이 있나 보다고 전화실로 가더니 잠시 후에 뛰어 나오며, "왜적이 항복한다!"..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4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이리하여 5당 통일도 실패되어서 나는 민족진영 3당의 동지들과 미주, 하와이 여러 단체에 대하여 나의 불명한 허물을 사과하고 이어서 원동에 있는 3당만을 통일하여 새로 한국독립당이 생기게 되었다. 하와이 애국단과 하와이 단합회가 각각 해소하고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가 되었으니 역시 5당 통일은 된 셈이었다. 새로 된 한국독립당의 간부로는 집행위원장에 김구, 위원으로는 홍진, 조소앙, 조시원, 이청천, 김학규, 유동열, 안훈, 송병조, 조완구, 엄항섭, 김붕준, 양묵, 조성환, 차이석, 이복원이요, 감찰위원장에 이동녕, 위원에 이시영, 공진원, 김의한 등이었다. 임시 의정원에는 나를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거하였는데, 종래의 주석을 국무위원이 번갈아 하던 제도를 고쳐서 대내..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3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광주에서는 중국 군대에 있는 동포 이준식, 채원개 두 분의 알선으로 동산백원을 임시 정부의 청사로, 아세아 여관을 전부 우리 대가족의 숙사로 쓰게 되었다. 이렇게 정부와 가족을 안돈하고 나는 안의사 미망인과 가족을 상해에서 나오게 할 계획으로 다시 향항으로 가서 안정근, 안공근 형제를 만나 강경하게 그 일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은 교통이 어렵다는 이유로 듣지 아니하였다. 사실상 그때 사정으로는 어렵기도 하였다. 나는 안의사의 유족을 적진 중에 둔 것과 율양고당암에서 중국 도사 임한정에게 선도를 공부하고 있던 양기탁을 구출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향항에서 이틀을 묵어서 광주로 돌아오니 거기도 왜의 폭격이 시작되었으므로 또 나는 어머님과 우리 대가족을 불산으로 이접하게 하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2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어머니는 대로하여서, "내 아들을 찾는 데는 내가 경관들보다 나을 터이고, 또 가라고 허가를 하여서 가장집물을 다 팔게 해놓고 이제 또 못 간다는 것이 무슨 법이냐. 너희놈들이 남의 나라를 빼앗아 먹고 이렇게 정치를 하고도 오래 갈 줄 아느냐." 하면서 기절하셨다. 이에 경찰은 어머니를 김씨네에게 맡기고 가 버렸다. 그 후에 경찰이 물으면 어머니는, "그렇게 말썽 많은 길은 안 떠난다." 하시고는 목수를 불러 다시 집을 수리하고 집물을 마련하시는 등 오래 사실 모양을 보이셨다. 이러하신 지 수삭 후에 어머니는 송화 동생을 보러 가신다 칭하고 신아를 데리시고 신천으로, 재령으로, 사리원으로 도막도막 몸을 옮겨서 평양에 도착하여 숭실중학교에 재학 중인 인아를 데리고 안동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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