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조선 수군의 첫 승리 옥포해전 전투 결과와 의의

올드코난 2015. 3. 25.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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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 해전(玉浦海戰) 1592년(선조 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경남 거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며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다.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의 1차 출정, 조선 수군의 첫 승리 옥포해전 결과와 의의


1.전투전 상황

총통(화포) 대 조총의 해전 한반도 남해안의 여러 섬과 포구를 장악한 일본 수군이 거제도 쪽으로 진출하자 원균은 전선과 무기들을 수장시키고 거느리고 있던 수군 1만을 해산시켰다. 국조보감 그리고 옥포만호 이운룡, 영등포만호 우치적과 함께 남해현 앞바다에 머물러 있다 육지로 피할 예정이었다. 원균은 뒤늦게 율포만호 이영남을 시켜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는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책임 회피성 책임 떠넘기기로 보여진다)

이에 이순신은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닌 경상 해역에 출전하는데 고민을 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5월 1일에 전라좌수영으로 모이자고 했지만 약속날인 5월 1일이 되어도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이 도착하지 않자 이순신은 다시 고민에 빠지는데 이유는 전라좌수영이 보유한 판옥선은 불과 24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출전하지, 이억기의 함선을 기다려야 할지 큰 고민에 빠지게 된다.

5월 3일(음역) 녹도만호 정운이 이순신을 찾아와 "이번 기회가 아니면 안된다."라며 설득, 이순신은 전라좌수군만으로 첫 출정을 결심하게 되었다.

조금 뒤에 녹도만호가 보자고 하기에 불러들여 물었더니,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분통한 마음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ㅡ《난중일기》임진년 5월 3일

다음날 5월 4일 이순신은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함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이끌고 전라·충청 지방에 이르는 해로의 목줄인 옥포만으로 향했다. 그러나 포작선(쾌속선) 46척은 어선에 불과한 비전투선으로 이후 임진왜란이 끝날때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다. 음력 5월 4일(양력 6월 13일) 새벽에 여수 항을 출발, 음력 5월 6일(양력 6월 15일) 아침에 당포 앞바다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의 함대(판옥선 네 척, 협선 두 척)와 합류하였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의 연함함대 91척의 총지휘는 이순신이 맡게 되었다.


2.옥포해전 전투 과정

거제도 송미포에서 밤을 새우고 낙동강 하구의 가덕도로 항진하던 연합함대는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새벽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이 적을 발견했다는 신호로 신기전을 발사하고 그 신호를 본 이순신은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라는 명령을 내리며 조용히 일본 수군을 향해 진격해 간다.

정오 (12시) 무렵 척후장 김완이 옥포에 정박 중인 일본 수군 함선 오십여 척을 발견한다. 선봉장 이운룡을 선두로 돌격을 감행하며 맹렬한 화포 사격을 퍼붓자 기습을 당하고 전열을 갖추지 못한 일본 수군은 해안선을 따라 탈출을 시도했다.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퇴로를 봉쇄하고 총통과 화살로 무차별 공격을 퍼부으면서 일본 수군의 선단을 해안선 쪽으로 압박하였다. 일본 수군의 일부는 포위망을 뚫고 해상으로 탈출했지만 나머지는 배를 버리고 해안에 상륙하여 산 속으로 도주했다. 호리노우치 우지요시는 이 전투에서 우치적이 쏜 기름칠을 해 놓은 불화살을 맞고 바닷물로 떨어졌는데 신호가 그의 시체를 건져 그의 목을 벤 후 그것을 높이 들어올렸다. 도도 다카토라는 탈출에 성공하였고, 이후 도도 다카토라는 이순신과의 전투에서 줄곧 패배를 거듭하게 되었다.


3. 합포해전

합포 해전(合浦海戰)은 옥포 해전이 벌어진 당일(선조 25년 음력 5월 7일) 오후에 있었던 전투로 옥포 해전의 소식을 접하지 못한 왜군의 소함대(5척)를 전멸시켰다. 같은 날 벌어졌고 작은 전투였기에 옥포해전과 합포해전을 같이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4.적진포 해전(赤珍浦海戰)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이 있은 그 다음날인 1592년 6월 17일(선조 25년 음력 5월 8일)에 발생했다. 전날의 여세를 몰아 조선 수군은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 중이던 일본군 함대를 공격하여 모두 11척을 격침시켰고 일본 수군 2840명이 전사했다. 이순신의 1차 출정은 적진포 해전으로 마감하고 다시 본영으로 복귀한다. 이때에는 아직 거북선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보통 6월 16일(음력 5월 7일)의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 그리고 이 적진포 해전까지 합쳐서 옥포 해전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5..옥포해전의 의미

조선측의 피해는 부상자 1.2명이 전부였다. 반면 일본군은 26척의 배가 침몰했으며 4080명이 전사했다. 일본군 포로는 5명이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옥포해전의 승리는 이후 제해권이 조선에 넘어갔음을 알리며 이순신 장군 이름이 일본군에게도 알려지게 된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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