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거북선의 등장, 사천 해전(泗川海戰)과 당포 해전(唐浦海戰) 외

올드코난 2015. 3. 25.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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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해전(泗川海戰)은 1592년 음력 5월 29일(양력 7월 8일)에 사천에서 왜수군 13척을 전멸시킨 해전으로, 이순신은 여기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 투입했다

임진왜란 거북선의 등장, 사천 해전(泗川海戰), 당포 해전(唐浦海戰), 당항포 해전(唐項浦海戰), 율포해전(栗浦海戰)


[사천 해전]

1.조선과 왜의 병력

조선: 거북선 2척, 판옥선 26척,

왜: 전선 13척


2.전투 과정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42척의 전선을 격침당한 왜군은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점령을 위해 서해안으로 북상을 기도하였다. 1592년 7월 8일(음력 5월 29일) 이순신은 판옥선 40여 척을 거느리고 거제를 출발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여 사천 선창에 있는 왜군의 정보를 물어 사천으로 추격한다.

왜군은 사천으로 상륙하여 배는 산 밑에 매어두고 산위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가에 정박하고 있던 이순신은 단병접전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으로 유인작전을 사용하게 된다. 육지에 대기 중이던 왜군이 승선하여 조선 수군 함대를 쫓아오자 바다에서 뱃머리를 돌려 반격으로 나섰다.

반격당시 선두는 거북선으로 거북선 돌격장인 이언량, 이기남이 거북선을 지휘를 하고 있었다. 거북선이 왜 수군 사이로 헤집고 다니자 판옥선들이 후미에서 화포 공격을 하며 그 뒤를 따랐다. 전투 결과 적 함대 13척을 모두 격침시켰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지만, 마친 후 부하를 시켜 칼끝으로 총탄을 파내게 했다고 하지만 이는 확인이 필요


3.전투 결과

전투에 패한 왜군은 부산과 거제도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선조는 이 전투의 승리로 이순신에게는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의 벼슬을 하사하였고, 이억기와 원균은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4.당시 왜군

이 전투에 참전한 왜군 선박 13척은 '누각과 같이 생긴' 이라는 말이 장계에 있어서 모두 아다케부네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다케부네가 일본에서 매우 희소한 함선이었음을 고려하면 좀 큰 세키부네나 아니면 그냥 누각처럼 생긴 세키부네였을 확률이 높다.


5.관련 유적

현재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성은 당시 왜군들이 배를 정박하고 산성을 쌓아 조선군에 대항하였던 성으로, 현지의 주민들에게는 왜성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이곳은 돌격선인 거북선이 최초로 사용된 곳이기도 하다.



[당포해전]

1.개요

당포 해전(唐浦海戰)은 1592년(선조 25년) 7월 10일(음력 6월 2일) 전라좌수영 및 경상우수영의 연합함대가 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시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해전이다.


2.전투 전

이틀전 사천 해전을 치른 함대가 사량도(蛇梁島)에 이르러 이곳에서 밤을 보냈다. 전투 당일 음역 6월 2일 오전 8시 척후선으로부터 당포 선창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연합함대는 곧 당포(지금의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 앞바다로 나아갔다. 당포 선창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 및 소선 12척이 매어 있었다. 함대 지휘관은 왜장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였다.


3.전투 과정

이 전투는 사천 해전에 이어 두 번째로 거북선을 앞세운 전투다. 특히 기함을 집중 공격하였는데, 중위장 권준(權俊)이 가메이 고레노리으로 추정되는 왜장을 화살로 명중시켜 바다로 떨어뜨리자, 첨사(僉使) 김완(金完)과 군관 진무성(陳武晟)이 목을 베었고,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기 바빴다.

하지만, 일본의 기록에서는 왜장 가메이 고레노리는 생환해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권준의 화살 맞고 죽은 적장은 구루시마 미치유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레노리에게 준 금부채가 전리품으로 노획되었다. 왜선 21척은 모두 격침되었고, 왜군 2820명 전사를 했지만, 조선군의 피해는 없는 완벽한 전투였다.


[당항포 해전]

1.개요

당항포 해전(唐項浦海戰)은 1592년 음력 6월 5일(양력 7월 13일)에 이순신이 지휘하는 삼도수군 연합함대가 고성의 당황리 앞바다 당항포에서 왜군을 격파한 해전이다. 유인작전으로 먼 바다로 끌어내어 싸웠다.

2.병력

조선군 전선 51척, 일본 전선 26척

3.전투 과정

거제도 주민들로부터 "일본 함선들이 고성의 당항포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선 수군이 포구로 접근하자, 당항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던 왜군 함대는 일제히 조총을 사격하면서 대응태세를 취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 수군의 육지 탈출을 봉쇄하기 위해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기로 하고, 함대를 서서히 철수시켰다. 왜군은 해안에 대기 중이던 병력까지 승선시켜 조선 수군을 추격하였다.

왜 함대가 포구 밖으로 나오자, 조선 수군은 신속히 진형을 바꾸어 퇴로를 차단하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거북선을 뒤따르던 판옥선에 탄 군사들이 불화살을 쏘아 누각선이 화염에 휩싸이자, 당황한 적장은 우왕좌왕하다가 조선군의 화살에 사살되었고, 전의를 상실한 왜군의 대다수가 당항포 먼바다에서 격침되었으며, 일부 함선이 포구 안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도망간 왜군도 이튿날 새벽에 탈출을 시도하던 중 해협 입구를 지키고 있던 조선 수군에게 모두 격침되었다. 전투 결과 왜군 전선 26척이 모두 격침했고 왜군 2720명이 전사했다.


[율포 해전]

율포해전(栗浦海戰) 1592년 7월 15일(음력 6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삼도수사(三道水使)의 연합함대가 거제도 율포만에서 부산으로 향하려던 일본 함대(대선 5척, 소선 2척)를 발견하여, 대선 2척과 소선 1척을 불사르고, 나머지는 소선 1척은 붙잡았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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