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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3대 대첩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행주대첩 의미와 결과

올드코난 2015. 3. 29.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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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 크게 이긴 전투)으로 불리고,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도 불리고,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로 불린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행주대첩(幸州大捷) 의미와 결과


1. 전투 배경

임진왜란 초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이치 전투와 독성산성 전투 등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가 된 권율은 행주산성에 웅거하며 명군과 합세해서 한양을 탈환하려다 명군이 벽제관에서 대패하여 평양으로 돌아감으로써 고립 상태에 빠졌다. 한편 일본군은 총퇴각을 하던 중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을 대파하고 한양에 머물게 되는데.


2.병력 상황

(조선) 병력 2800명/ 지휘관: 권율, 선거이 병사, 김천일 창의사, 조경 조방장, 허욱 충청감사, 배흥립 조방장, 정걸 수군

(왜) 병력 3만 여명/ 지휘관: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오타니 요시쓰구, 나가오카 다다오키, 가토 기요마사, 나카야 센시로, 아카시 요에몬, 도자키 히코에몬노조


3.전투 직전 준비 상황

권율은 관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한 뒤,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의 원군과 호응해 서울을 되찾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그는 군대를 서울 근교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에게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도록 하였다. 조경은 양천(陽川)에서 한강을 건너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아내어 권율에게 보고하였다. 권율은 서울 주변인 안현(鞍峴)에 진을 치려고 했으나 막하 장수들이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조경이 물색한 곳으로 결정했는데, 이 곳이 행주산성이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조경으로 하여금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은밀히 군사를 이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휘하 병력 중 4,000명을 뽑아 전라도병사 선거이(宣居怡) 지휘 하에 금천(衿川 : 지금의 시흥)에 주둔시켜 서울의 적을 견제하였다. 이 때 죽산에서 패한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도 정예병 1,000명을 거느리고 양천에 주둔해, 행주산성과 금천 중간 위치에서 일본군을 견제하였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행주산성에 배수진을 친 권율을 돕기로 하였다.

권율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조경 등과 함께 행주산성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승장(僧將) 처영(處英)도 승의병(僧義兵)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 명이 못 되었다. 이후 권율이 정예병을 뽑아 서울에 보내어 전투 태세를 갖췄다.

 

왜장들은 이치와 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경험한지라 단번에 침공해 권율의 군대를 무찔러 위험을 없애자고 결의하였다. 한 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던 총대장 우키타(宇喜多秀家)를 비롯해 이시다(石田三成)·마시다(增田長盛)·오타니(大谷吉繼)의 세 봉행(奉行 : 통치자 장군을 보좌하던 최고 무관직) 등 본진의 장수들까지 7개 부대로 나눠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 이 때 전 병력은 3만여 명이었다.

행주 산성 안의 조선 관군이 소지한 무기는 궁시(弓矢)·도창(刀槍) 외에, 변이중이 만든 화차(火車),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水車石砲)라는 특수한 무기가 있었다. 또, 산성에서는 일본군이 몰려올 것에 대비해 성책을 내외 이중으로 만들었다.

토제(土堤)를 쌓아 조총 탄환을 피할 수 있게 했고, 병사에게 재를 담은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였다. 일본군이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권율은 이번 한판싸움에 병사들의 생사는 물론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주지시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4. 전투 상황

1593년 2월 12일 오전 6시 경 일본군의 선봉 100여 기(騎)가 나타나더니 뒤이어 대군이 밀려 왔다. 제1대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선봉으로 나섰다. 고니시는 평양성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벽제관(碧蹄館)전투에도 참전하지 않았는데 행주산성을 설욕할 좋은 기회라 여기고 공격에 앞장선다.

왜군이 쳐들어 조자 행주성 안의 조선군은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 진천뢰(震天雷) 총통(銃筒), 강궁(强弓)으로 맞선다. 몰려들었던 왜군이 조선군의 화력에 혼비백산하고 고니시의 제1대는 물러간다. 이어서 이시다가 이끈 제2대도 공격에 실패한다.

왜군 제3대 대장 구로다(黑田長政)는 임진년(1592년) 9월 연안성(延安城)싸움에서 의병에게 대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긴 방죽 위에 누대를 만들고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 명을 배치해 성 안으로 조총을 쏘게만 하고 병졸에게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본 조선장수 조경은 대포를 쏘아 이를 깨뜨렸다. 포전(砲箭) 끝에 칼날 두 개씩을 달아 쏘니 맞는 자는 즉사하였다.

제1대부터 3대까지 연패하는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총대장 우키타는 크게 노해 선두에 나서고 소속된 제4대 장병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제4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진격해 제1성책을 넘어서 제2성책까지 접근하였다.

관군은 한때 동요했으나 권율의 독려로 힘을 얻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화차의 총통이 적장에게 집중 사격되어 우키타는 부상을 입고 부하의 부축을 받으며 퇴진하였다. 그리고 이때까지 남아 선두에서 지휘하던 제2대장 이시다도 부상으로 후퇴한다.

제5대장 깃카와(吉川廣家)는 제4대의 뒤를 이어 화통(火筒)을 성책 일부에 집중 발사해 불이 붙게 했으나 관군은 미리 마련한 물로 꺼 버렸다. 관군이 시석(矢石)을 퍼부어 깃카와가 큰 부상을 입고 퇴각했고 부하 병졸의 사망자만도 160명이나 발생하였다.

 

두 대장의 부상에 분노한 제6대장 모리(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小早川秀秋)는 제2성책을 공격하였다. 이에 처영은 승의군을 이끌고 용감히 맞섰다. 그리고 승의병이 각기 허리에 찬 재를 뿌리자 눈을 뜰 수 없게 된 적군은 달아나고 말았다.

일본군은 마지막 남은 제7대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7대장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는 노장으로 선두에 서서 서북쪽 자성(子城)을 지키던 승의군 한 귀퉁이를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였다. 이에 승의병이 동요해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 때 권율은 대검을 빼들고 승의군의 총공격을 호령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해 투석전을 폈는데,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해 싸웠다.

성 안에 무기와 군인이 부족한 상황을 눈치챈 적군이 기세를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李蘋)이 화살 수만 개를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였다. 이에 당황한 적은 성 안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 안의 관군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적을 추격해 130급(級)을 베었다. 그리고 파괴된 내성도 급히 보수했다.

적군은 퇴각하면서 사방에 흩어진 시체를 불태웠다. 아군은 그들이 버리고 간 갑주(甲胄) 도창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했는데 노획물 중 중요한 것만도 272건이었다. 적군이 버리고 간 적의 시체가 200구가 넘었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전한다.


5.행주 대첩 결과

조선군의 사상자는 130여명이었던 것에 반해. 왜군은 15,000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만 9000명이라고 하는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였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대첩이 있은 다음 권율은 병력을 이끌고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본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

행주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빛난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까지 하사받았다.

행주대첩 이후 일본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진출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철수를 하게 된다.


6.일화

행주대첩하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성내의 아녀자들이 치마 위에 짧은 덧치마를 대어 적군들에게 던질 돌덩이를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1527년(중종 12년) 최세진이 편찬한 사성통해(四聲通解)에 의하면 임진왜란 전부터 행주치마라는 단어가 존재했다. 그리고 행주는 당시 지명이었다. 행주치마와 이름이 같아 이런 일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때 아녀자를 포함한 일반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같이 싸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7.행주대첩 의의

직전 벽제관전투에서 명나라가 대패하고 전세 분위기가 역전될 수도 있던 상황에서 행주산성에서의 대승리로 전세는 다시 조선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무능한 조선의 조정은 이 승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명나라에게 계속해서 끌려다닌다. (한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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