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임진왜란 의병장 중봉 조헌 (重峯 趙憲) 생애와 평가

올드코난 2015. 4. 5.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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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하면 칠백의총과 의병장 조헌 선행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고경명·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壬辰四忠臣)의 한 사람인 중봉 조헌에 대해 알아본다.

임진왜란 의병장 중봉 조헌 (重峯 趙憲)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

조헌(趙憲, 1544년 ~ 1592년)은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렬(文烈). 본관은 배천(白川). 성혼의 문인이다. 참고로 배천 조씨는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 조광윤의 후손이다.


2.생애, 관료생활

조헌은 5살 때에 글을 읽는 등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효성이 있고 유순했다. 집은 가난했지만 12세 때부터 김황(金滉)에게 시와 글을 배워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67년(명종 2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에 속하였다. 이후 정주(定州)교수로 3년간 있으면서 그곳 선비의 풍속을 일신시켰다. 파주 교수로 옮겨 성혼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니 성혼은 사양하면서 감히 사제 간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년) 홍문관 정자(正字)로 왕의 불공(佛供)을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의 문물과 제도의 따를 만한 것을 조목별로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후에 박사(博士), 호·예 2조 좌랑, 전적(典籍), 감찰 등을 거쳐 경기도 통진(通津) 현감으로 다스리다가 법을 어긴 궁노비를 취조 중 장살(杖殺)하고 부평에 귀양 갔다.

1581년에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전라도사로 나가 소를 올려 연산군 때의 공안(貢案)이 민폐가 되므로 개혁할 것을 청하고 이율곡 등의 선비들과 친분을 유지하였다.

1582년에는 보은 현감으로 소를 올려 노산군(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할 것을 청했지만 모함을 받아 파면된다.

1586년 조정에서 학제(學制)를 수정하고 각도 제독(提督)을 창설할 때 공주(公州) 제독이 되어 선비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이때 또 소를 올리는 한편 정여립의 행패를 따지고 공격하였으나 관찰사가 화를 두려워하여 여러 번 물리치므로 벼슬을 내놓고 옥천(沃川)으로 돌아갔다.

1589년에는 대궐에 엎드려 소를 올려 시정(詩政)의 장단점을 철저히 논하였는데 광론(狂論)이라 하여 삼사의 배척을 받고 길주(吉州)로 귀양 갔으나 그해 겨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다 하여 석방되었다. 이렇듯 조헌은 철저한 유교적 입장에서 많은 개혁안을 상소하고 정론(正論)을 폈다.



3.전쟁전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등을 보내와서 명나라를 칠 것을 전달하여 임금과 신하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상소를 올려 겐소 등을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경하여 왜군을 대비할 책을 상소했으나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시골에 내려가 왜란에 대비하였다.


4.임진왜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호서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보은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였으나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의 시기로 홍성 지방에 옮겨가서 또 의병 천여 명을 모집했다. 이때 왜군은 청주에서 진을 치고 있어 관군이 여러 번 패하였는데, 승장(僧將)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여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등 전과를 세웠다.

곧이어 의주로 북상하기 전에,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게 되었다. 그때 당시 금산(錦山)의 왜군이 충청도 일대로 세력을 넓힐 기세라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영규와 함께 금산을 향해 가서 왜군에게 함락된 금산의 10리 밖에 이르렀다. 당초 호남 순찰사 권율과 합세하여 적을 협공할 약속이었으나 권율로부터 그 기일을 미루자는 편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은 이미 조헌이 거느린 의병의 약점을 알고 역습해 왔다. 의병은 역전 분투하여 왜군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하여 조헌과 7백의사가 전멸했다. 2차례에 걸친 금산전투는 당장은 패전이라고 볼수도 있지만, 왜군에도 큰 타격을 주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하게 해 결국 왜군이 물러나게 되고 호남지역을 지키게 된다.


5.사후

1604년(선조 37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609년(광해군 1년)에 그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액이 하사되었으며, 1754년(영조 30년)에 영의정으로 추증, 문묘에 종사되었다.


6.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 혹은 칠백의총 문제

칠백의총(七百義塚)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고경명, 조헌, 영규 대사를 비롯한 700여 명의 의사가 묻힌 묘역으로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위치해 있으며, 1963년 사적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근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 실재 금산2차전투에서 싸운 의병은 승병들을 포함해 1500명에 이르렀다. 한데 승병들을 제외하고 700명에 대해서만 의사를 인정한 것이다. 이 문제는 여전히 불교계에서 지적을 하고 있고, 반드시 해결해야할 역사적인 숙제라 할 것이다.



7. 올드코난이 생각하는 중봉 조헌 선생

2007년 쯤 옥천에서 중봉 조헌 선생 묘소를 다녀왔었다. 관광지가 아니라 한산했었다. 시골이어서 교통 편도 좋지 않았었다. 아시는 분과 같었는데, 배천 조씨 가문에서 조헌 선생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커서인지, 당시 길 안내를 해준 분도 조헌 선생의 후손이었다.

중봉 선생의 삶을 보면, 조선 선비의 전형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당시, 사대부들의 붕당정치로 정치가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지켜려 노력을 했고, 조헌 선생이 파직되었던 이유도 자세히 보면 백성들을 위해 기득권들을 겨냥한 개혁을 하려 들었기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먼저 의병활동을 시작한 것도 애민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때문이다.

권력자들이 백성들을 버리고 도주하던 그 시기 조헌 선생은 목숨을 내던지고 왜군에 맞서 싸웠다.

이런 조헌 선생을 조선의 선비의 대명사로 존경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칠백의총이라는 말은 조헌 선생이 원했던 것이 아니다. 당시 조정에서 급히 내린 이름이다. 조헌 선생은 승병들과 큰 유대관계에 있었기에, 승병장 영규 대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그래서 조헌의 의병과 승병이 같이 왜적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인데, 금산에서 같이 전사한 승병들이 무시당한 것을 조헌 선생은 원치 않을 것이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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