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임진왜란 임진사충신 4번째 김천일 생애와 평가

올드코난 2015. 4. 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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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의병장들중에 고경명, 김천일, 조헌, 곽재우 등을 임진사충신으로 불린다. 임진사충신 4번째 김천일에 대해 알아 본다.


1.출생 및 가계

김천일(金千鎰, 1537년 ~ 1593년)은 1537년 전남 나주군에서 진사(進士) 김언침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사중, 호는 건재(健齋), 본관은 언양이며, 시호는 문렬(文烈)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이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73년(선조 6년) 학행으로 발탁되어 군기시 주부가 되었고, 이후 용안현감과 강원도·경상도의 도사를 역임하였다. 사헌부 지평 때 상소를 올렸다 좌천되어 외직으로 나갔으며, 1578년(선조 11년) 임실 현감을 지냈다. 이후 담양부사·한성부 서윤·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2.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 때에 나주에서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박광옥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고, 5월 6일 의병을 일으켜 평안도를 향하다 왜적과 전투를 벌이며 수원 행산고성을 거쳐, 8월 전라병사 최원의 관군과 함께 강화성으로 들어갔다.

그 공으로 장례원 판결사가 되고 창의사의 군호를 받았다. 왜군의 점령하에 있던 한성부에 결사대를 비밀 잠입시켜 싸우거나, 한강변의 여러 왜군진을 급습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군대가 개성으로 오고 있을 때, 이들에게 지형과 적의 형편 등을 알려 작전을 도왔다.

왜군이 남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를 추격하여 1593년 음력 6월에 절도사 최경회 등과 진주성에 주둔하였다. 1593년 명나라와 왜국 간에 강화가 제기되었을 때 이를 반대했다.



3. 제2차 진주성 전투와 최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이 대군을 이끌고 성벽을 넘어 들이닥쳤으나, 아군은 화살이 떨어지고 창검이 부러져 대나무 창으로 맞서 싸우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그의 아들 김상건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4.사후

이후에 증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 추증되고, 1618년(광해군 10)에 증 의정부영의정이 가증되었다. 나주의 정열사, 진주의 창렬사, 순창의 화산서원, 태인의 남고서원, 임실의 학정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이다.


5.평가

류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김천일은 의만 높고 재주가 없어서 졌다.”고 평가했다. 유성룡이 이와 같이 평가를 한 것은 1차 진주성 전투와 달리 2차 진주성 전투는 모든 조선 장수들이 퇴각을 명했는데, 이를 무시하고 싸워 비록 왜군에게 타격은 주기는 했지만, 무고한 양민 6만명이 학살된데에 따른 비판도 있다. 김천일이 의병으로서 목숨을 다해 싸운 점은 칭찬을 해주어야 했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병력을 철수해 권율을 포함한 조선 군들과 합세를 해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최선이었기때문이다.

이 점을 류성룡이 안타까워 한 것이다.

만일 서예원 진주목사와 김천일이 논의해 진주성을 포기했더라면 당장에는 왜군에게 물러난 것처럼 보일지라도 전략적으로 힘을 비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목숨을 바쳐 순국한 그의 의기는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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