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정유재란, 조선 최악의 패전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패배의 진실

올드코난 2015. 7. 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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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은 1597년(선조 30년) 8월 27일 (음력 7월 15일) 칠천도 부근에서 벌어진 정유재란의 첫 번째 해전이며 임진왜란 발발이후 조선수군 최악의 패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당시 수군을 지휘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을 포함한 수많은 조선 수군이 목숨을 잃었다.

정유재란, 조선 수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은 조선 수군의 전멸이 아니라 원균의 도주로 흩어졌던 것이다.


1. 이순신의 파면

조선을 재침(정유재란)을 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목표는 임진왜란과는 달리 전라도를 포함한 조선의 하삼도였다. 문제는 조선 수군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는 고니시가 1군이었지만, 명과의 협상 당시 풍신수길을 기만한 죄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탓에 정유재란의 1군은 가토였고 고니시는 2군이었다.

조선 재침(정유재란)이 명령되자 가토 기요마사의 제 1진이 조선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게되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어 가토의 도해 정보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조정에서 다시 공격 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가토군이 부산에 상륙한 뒤였다. 이에 이순신은 공격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다.(*이순신 장군이 선조의 명령을 거부했던 것이 아니다) 이때가 1597년 3월 1일(정유년 음력 1월 14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선조의 의심을 받던 이순신 장군은 이를 빌미로 한양으로 압송되고 모진 고문을 당하고 처형될 위기에 처하지만, 정탁과 이원익 같은 충신들이 선조를 간신히 설득해 처형을 면하고 백의종군하게 된다.


2.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문제는 이순신의 후임으로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것이다. 원균이 이순신 대신 통제사가 된 것은 스스로 부산포에 나가 싸우겠다는 상소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고 나서는 말을 바꾼다. 조정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왜군과 싸울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적은 수의 왜군을 보고도 도주한 기록도 있다. 선조가 그리도 신임했던 원균은 겁쟁이였던 것이다.

원균은 조정에 아군의 힘으로는 부산 바다로 들어가 토벌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등 안골포와 가덕도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먼저 육군으로써 몰아낸 이후에야 들어가 싸울 수 있다는 등의 말을 하지만, 당시 조선의 병력 동원능력을 넘어선 30만의 육군이 출동해 섬인 가덕도를 수군이 아닌 육군으로 쳐 달라는 비현실적인 주장까지 펼쳤다.


3.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거제도 전투 패전

1597년 3월 25일 원균은 통제사가 된 후 승전을 보고하는데, 거제도로 나무하러 온 왜적 80여명을 강화 회담 중이라는 걸 핑계로 술을 먹여 안심시킨 후 부산포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가 조선 수군 전체가 공격하여 전멸시켰다는 것이었다. 비변사에서는 나무하러 온 적을 잡아서 공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지만 선조는 나무하러 온 적 역시 적이라면서 상을 주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고성 현령 조응도와 140여명의 병력이 전멸하고 판옥선을 뺏겼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일본에서 이것을 항의하면서 원균이 공격하지 않기로 해 놓고 각기 32명과 15명의 나무하러 간 병력을 죽였다고 하면서 포상은 흐지부지된다. 피해를 입은 측에서 주장하는 수가 더 적고 원균이 올려보낸 수급이 47급이었다는 것에서 일본측의 주장에 신뢰성이 있으며, 이 전투 아닌 전투에서 원균은 47명을 잡는 대신 140명과 판옥선 한 척을 잃은 패전이었다는 게 확인되었다.


4.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2번째 패전 웅천해전

1597년 7월 초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수군에 첩자를 보냈다. 도요토미가 보낸 첩자 중 경상우수영에 파견된 요시라는 경상우수사 김응서를 속였다. '왜선(倭船)이 지금 연이어 바다를 건너오고 있으니 그들에게 방비가 없음을 틈타 주사(舟師)로 요격한다면 오히려 이득을 취할 것이오.'하였다. 이때 원균은 왜인의 말이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은 출전을 명하여 독전(督戰)하였다. 6월 말 원균은 수군을 이끌고 웅천(熊川) 앞바다로 나갔으나 평산포만호 김축과 보성만호 안홍국이 적탄을 맞아 전사했고, 수군은 별 성과 없이 돌아오게 된다.


5. 칠천량 해전 진행과정

(칠천량 해전에 대해서는 확실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이는 괘멸이 되어 버린 탓도 있지만, 지휘자 원균이 도주를 해 버렸고 주요 장수들 역시 행방이 묘연해진 상황에서 어떤 이들이 벌어졌는지 증언을 해줄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1597년 8월 16일(음력 7월 4일) 원균은 2월 초에 이순신이 동원했던 63척보다 두 배 이상 많은 100척이 훨씬 넘는 판옥선, 거북선과 1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수군을 총동원한다.

1597년 음력 7월 부산 앞바다에서 왜군이 도주하자 원균은 급하게 추격하다가 적진 깊숙이 들어간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뱃사람들이 이미 수령(水嶺)을 넘었노라고 고하니 이때 놀라 급히 배를 돌려 퇴각했지만 파도에 의해 12척의 배를 잃게 된다. 후퇴 후 물을 구하기 위해 가덕도에 급히 내렸는데 가덕도의 적이 공격해 왔고 원균은 400명의 병력을 남기고 급히 퇴각한다.

그러나 왜군의 추가 지원군이 나타나자 원균은 바로 군대를 물리고 지원군을 요청했다. 원병(援兵)을 더하여 다시 진격할 계책을 청하였다. 원균은 계속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육군이 없애 주기만을 고집했고, 권율은 원균을 잡아다 원문(轅門)에서 곤장을 쳤다. 원균은 어쩔 수 없이 부산포 앞바다로 향한다.

거제도 서쪽의 작은 섬 칠천도 남쪽에 정박했던 원균의 조선수군은 일본수군에 야습을 당한 이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계속 퇴각한다. 원균은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않은 채 기록에 의하면 선상에서 폭음을 하였다고도 한다. 견내량 혹은 춘원포에서 삼도수군을 상륙하게 한 뒤 반격하지도 않은 채 도주했다. 포로가 되었던 조방장 김완이 진술한 《해소실기》에는 이 때 아군이 각기 수사를 따라 퇴각했다고 하면서 조선 수군이 기습을 받은 상황에서도 지휘권이 유지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지휘를 무시한 채 퇴각한 배들은 진해, 한산도 방면으로 향했고, 또한 선전관 김식의 초기 보고에 의해 전사했다고 알려진 수군 장수들 다수가 체찰사 이원익의 조사 결과 살아있음이 확인돼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를 통해 춘원포로 퇴각, 상륙한 것은 원균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칠천량 해전에서 판옥선을 잃었다 해서 장수와 수졸들이 전멸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고성 지역 춘원포까지 후퇴하여 통제사 원균과 중군장 순천부사 우치적은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왜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고 하지만,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실록에서는 이 때 아군이 활 한 번 제대로 쏘지 못 한 채 패했다고 하면서 아군의 대응을 문제삼았고, 케이넨의 조선일일기에는 이 때 반격한 병력이 일본 수군이 아닌 육군 수송함대 병력인 것이 확인된다.



6.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친 이유

당시 도원수 권율은 부산진 전투에서 원규에게 2번 곤장을 친다.

첫 번째는 원균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육군이 없애라는 주장때문인데, 이는 당시 원균이 왜군에게 겁을 먹었기에 화를 낸 것이라고 본다. 당시 수군 병력은 조선수군이 왜의 수군보도 더 뛰어났다.

두 번째 곤장 역시 같은 이유다. 병력을 잃고 혼자 도주하려는 원균에게 화가난 것이다.

원균은 전투 전만해도 조선조정을 향해 스스로 부산포에 나가 싸우겠다는 말로 선조를 안심시키고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근데, 막상 하는 짓은 비겁한 겁쟁이이니 이를 직접 봄 권율 장군이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 조선을 기만한 이유로 권율은 원균에게 곤장을 친 것이다.


7. 칠천량 해전 결과

- 조선측 피해: 거북선 3척 등 판옥선 100여척 침몰, 지휘관 포함 조선 수군 2만여 명 궤멸, 김완 포로로 끌려감, 배설전선 12척 이끌고 도주

일본측 피해: 100여 명 사상(추측) 가토 요시아키 왼팔 부상

1) 원균은 도망치다가 소나무 아래에 숨어있던 일본군들의 습격을 받아 아들 원사웅과 함께 전사했다고 하지만, 확실치 않다. 실록에 기록된 선전관 김식의 보고에는 원균이 적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돼 있지만 도원수 권율의 군관 최영길의 보고로 원균이 전사하지 않은 게 확인되었고, 조정에서는 1601년에 이르러서야 원균의 사망을 언급한다.

2) 충청수사 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당황하여 도망칠 궁리만 한 원균과 달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전사하였다.

3)경상우수사 배설은 휘하의 판옥선을 이끌고 도주해 한산도에 있는 군수물품을 전부 불태우고 도망을 쳤다.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조선 수군은 거북선(귀선) 3척 을 포함하여 배설이 이끌고 도주한 12척의 판옥선을 제외한 판옥선들은 전부 침몰하였다.

 

8.칠천량 해전의 영향

조선수군이 붕괴됨으로써 남해의 재해권 일본에 넘어간다.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은 대부분의 함선이 소실되고, 남해안의 제해권이 왜군쪽으로 넘어가게 되는 바람에 육군의 지원이 원활하게 진행되어 전라도까지 왜군이 침입하였다. 이때 뺏긴 남해안의 제해권은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할 때까지 왜군에게 있었다.

8월 28일(음력 7월 16일) 칠천량 해전 패배후 조정은 음력 7월 22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되지만 당시 수군은 사실상 괘멸상태였다.


9. 칠천량 해전의 패배이유

곤장을 맞은 원균은 이판사판이었을 것이다. 무능하고 겁이 많았던 비겁한 인물이었던 원균은 분명 도주를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의 목숨도,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한 충성도 없다. 그저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은 살고 싶었던 원균은 전투가 벌어지자 객관적으로 분명 왜의 수군보다 조선의 수군이 뛰어남에도 도망을 치고 말았다.

왜의 수군이 잘한 것이 아니라, 원균이 무능했던 것이 칠천량 해전의 패배이유였던 것이다.


10. 실재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적었다? 칠천량 해전의 진실

정한위략에 적힌 일본군의 전과는 170척 수준으로 판옥선과 기타 선박(협선)을 포함 300척이 넘는 조선 수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적은 규모로, 일본은 칠천량 해전의 의미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전과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완의 《해소실기》에서도 초기에 조선 수군을 공격한 일본군 병력이 단 두 척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포로가 되었던 정기수 역시 소수 병력이 기습했는데 수군이 적이 많은 줄 알고 도주했다고 진술하였다.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 역시 왜인들의 말을 빌어 칠천량에 정박한 조선수군 함대에 왜선 한 척이 접근해 조총 한 방을 쏘자 조선수군 함대가 놀라 도망치다가 스스로 무너졌다고 기록했다.

즉, 칠천량 해전이 패한 것은 맞지만 실재로는 조선 수군은 전멸한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이다. 이후 이순신 장군이 13척으로 명량대첩을 승리한 후 흩어졌던 조선 수군들이 다시 결집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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