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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천하 갑신정변(甲申政變) 원인과 배경, 실패 이유, 평가

올드코난 2015. 12. 4.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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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뉴스룸이 소개하는 오늘의 역사- 1884년 12월4일 발생한 갑신정변에 대해 나왔는데, 이에 대해 대략적으로 정리해 본다.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甲申政變) 원인과 배경, 실패 이유, 평가


1.갑신정변 개요

갑신정변(甲申政變) 혹은 갑신혁명(甲申革命)이라고도 불린다. 1884년 12월 4일(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무력 정변으로 진압 후, 갑신난, 갑신전란으로 불리다가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갑신혁명당의 난(甲申革命黨의 亂)이라 불렀다.



2. 갑신정변 시대적 배경

조선 후기 안동김씨로 시작된 세도정치와 오랫동안 조선시대를 지탱하던 계급사회는 조선의 정치 사회적인 발전을 가로막던 주요한 원인이었다. 이 시기 청나라를 통해 서구 문물이 유입되고, 일부 중인층 지식인과 서자들 등 조선 사회에서 외면받던 이들은은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하층민들 역시 자신들도 인간이라고 하는 인식과 자각을 하게 된다. 조선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이다. 이것이 내부 요인이라면 외부에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고조되었는데 단순히 문을 걸어 잠그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고, 외국 문물의 개방을 통해 사회 변화를 이끌려는 개화 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3.갑신정변 직접적인 배경

1874년 흥선대원군 실각 후 권력을 잡은 명성황후와 고종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강화도 조약 (조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그전인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였는데 조선군의 선제 발포를 문제 삼아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이 조약으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된다. 이후 위정척사파들의 시위는 격화됐고 1882년 임오군란으로 구식 군대 및 위정척사파의 추대를 받은 흥선대원군이 일시 집권했지만 명성황후는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이때부터 조선의 정치는 청나라로부터 노골적인 간섭을 받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불평 불만이 고조되고 북학파의 후신인 개화파들은 중국의 오랜 속국 노릇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1882년 8월 30일(고종 19년 음력 7월 17일)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해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 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 일본어: 済物浦条約)에 따라 사과 사절 등으로 일본에 건너갔던 박영효 일행은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와 정치개혁을 단행하겠다는 친일개화파들로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집권파 세력과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4. 개화파의 분열

개화파는 대부분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하생들이며 이동인과도 친분관계가 있었는데 개혁의 궁극적 방향을 같이하면서도 실현방법에서 온건파와 급진 개혁파(강경파)의 입장의 차이가 있었는데 위정척사파 축출에는 같은 의견을 보였지만 수구파, 척신 처리 방법과 청나라에 대한 사대교린등의 문제에서는 완전히 다른 자세를 보인 것이다.

김홍집, 어윤중, 박정양, 김윤식 등의 온건 개화파는 일단 부국강병을 위해 문호를 개방하고 여러가지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위정척사파를 상대하기 위해서 민씨 정권과 정치적 타협을 계속하고, 청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종전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힘을 키운 뒤에 청나라와의 관계를 끊자는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본딴 점진적인 개화를 주장한다.

반면 김옥균, 서재필,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딴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우선이며, 친인척을 등용하여 임오군란과 각종 민란을 유발한 민씨 정권 역시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규정해 모조리 제거해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급진 개화파의 주장에 대해 온건 개화파와 갈등이 빚어지게 된다. 급진파는 스스로를 개화당 또는 독립당이라 부르고, 온건파를 위정척사파, 민씨 세력과 싸잡아서 수구당, 사대당이라고 부르며 공격을 시작한다.

급진 개화파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윤웅렬, 유길준, 윤치호, 서광범, 서재창, 박영교 등이고, 온건 개화파는 김홍집, 김윤식, 박정양, 어윤중, 이조연, 이시영, 이상재, 민영익 등이었다. 이 중 민영익은 민씨 척신 세력과도 연결되는 인물로 급진파가 이런 온건파를 불신한 것은 당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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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소외되는 급진파

급진 개화파는 점차 요직에서 소외되어갔는데 재정난 타개책으로 일본에서 300만 엔의 차관을 들여오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여기에 급진파는 온건파가 척신 세력이나 위정척사파와 타협한 것으로 보고 서로를 불신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개화파는 분열되었고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개화파는 1884년 봄부터 정변(쿠데타)를 계획하게 된 것이다.



6. 정변 계획 및 준비

이 시기 청나라는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조선 주둔군의 절반을 철수시키고 있었는데 급진(강경) 개화파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개화파는 조정의 신진 관료들을 포섭하기 위해 1880년 초에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하생들이 만든 충의계(忠義契)를 통해 새로운 동지와 협력자들을 더 규합한다.

일본 역시 청나라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고 공사 다케조에를 통해 쿠데타 지원을 약속하고 김옥균 등은 일본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다.

급진 개화파는 여러 번 회합을 하다 1984년 9월 17일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킬 방안과 계획을 상세히 발표하는데 그들은 민씨 정권의 친청정책에 대항해 기존의 평화적 방법에 의한 개혁 보다는 온건 개화파와 민씨 척족의 연합 정권을 타도하고 일시에 권력을 장악해 개혁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거사일은 12월초에 있을 홍영식이 총판(總辦)으로 임명된 우정국의 개설 기념 및 건물 낙성식 피로연을 이용하여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사관학교의 유학생, 종래의 신식군대 가운데 자신들의 영향 아래 있는 조선군인을 동원하기로 하고 일본에서 귀국한 서재필, 서재창 형제가 이끄는 조련국의 병사들,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윤웅렬이 지휘하는 함경남도관군을 동원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해 8월부터 본격 훈련에 들어간 서재필의 조련국 병력으로는 사실 부족했고, 윤웅렬의 함경남도의 병영에서 병력을 전부 차출하는 것은 힘들다고 본 김옥균 등 개화당(급진개화파)은 부족한 무장능력을 보충하고 청나라군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측의 호의에 응한다.

일본 공사관측을 통해 교섭하는데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는 일본의 대륙 진출에 걸림돌이 되는 청나라와 민씨 정권을 내몰고 대륙 진출의 기반을 차지한다는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속내는 숨기로 개화파에게 일본군대 및 영사관 경찰 병력의 동원과, 정부 차관 제공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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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변 직전 상황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재필·서광범 등 급진개화파 세력들은 1884년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여기에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島村久) 서기관이 참석해 “서울에 주둔하는 청나라 병사를 구축하는 일은 우리의 1개 중대 150명으로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김옥균과 서광범에 말한다.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와 밀의한 끝에 일본군 주둔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키고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하고 다케조에 공사는 11월 16일자 일본 보고 문서에 “정변이 나면 그(김옥균)를 보호할 방침이며, 정변이 나더라도 우리의 1개 중대로써 청국의 현재 병력(단지 5~6백 명으로 추산됨)을 격퇴함은 지극히 용이한 일입니다.”라고 장담한다.

이러한 일본 공사의 호언장담에 고무된 김옥균 일파는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를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8.정변 진행 상황

1884년(고종 2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저녁 7시, 조선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郵政局) 개국 축하 연호가 열린 이날. 민영익을 비롯해 이조연, 홍영식, 김홍집, 한규직,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윤치호, 독일인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 그리고 미국 공사 존 루시우스 푸트, 영국 총영사 애시턴, 청국총판조선상무(淸國總辦朝鮮商務) 진수당(陳壽棠), 일본 공사관 서기관 시마무라(島村久) 등 각국 외교관이 참석했다.

연회가 무르익은 밤 10시 경, 갑자기 ‘불이야’란는 소리가 들리고 민영익이 밖으로 뛰어나갔다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서재창이 지휘하는 한 병사로부터 얼굴과 목에 칼에 찔렸다. 민영익이 땅에 쓰러지자 묄렌도르프가 그를 부축해서 달아났다. 연회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혁명 요인들은 계획한 대로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때맞춰 대궐 곳곳에서 화약이 터졌다. 김옥균 일행은 청국 군대가 쳐들어왔다고 거짓 보고를 하면서 고종에게 경우궁(景祐宮,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사당으로,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 빌딩 부근)으로 피신하고 일본공사에게 군대를 보내 보호를 요청했다. 연이은 폭발음 속에서 고종은 일단 이들의 말을 따랐다. 김옥균은 고종에게 "일본공사는 와서 나를 호위하라"(日本公使來護我)고 쓴 친서를 요구하고 고종은 흰 헝겊에 이를 써서 전달했다. 이 친서에 의해 이미 사전에 약속되었던 일본영사관 다케조에(竹添進一郞)가 이끄는 군 병력 1개 중대와 일본경찰 병력 1개 중대 일본군 200명이 경우궁을 에워쌌다. 이어 한규직, 이조연,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유재현 등 수구파 인물들이 죽음을 당한다.

정변을 주도한 개화파는 민씨 세력을 제거한 뒤 그 동안 민씨 정권에게 소외되어 왔던 왕실 인사로 조선 고종고종의 사촌 형인 이재선(李載先)을 12월 5일 자정, 궁으로 불러들여 부패관료와 척신 세력을 제거하고 새 정부를 구성할 것이니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며, 왕실과 연합정부 구성을 제안하고 새정부의 각료 선정에 착수하고 미국 공사관을 비롯, 각국 공사관에도 정변 소식을 전달하고 지지를 요청한다.


9. 내각 발표 및 혁신 정강 발표

다음날 12월 5일(음력 10월 18일) 창덕궁으로 돌아온 독립당은 각국 공사 및 영사에게 신정부의 수립을 통고하는 한편 개화파들은 인사를 발표하는데 영의정 이재원/좌의정 이재선/병조판서 이재완(李載完)등의 고종의 근친과 우의정 홍영식/형조판서 윤웅렬/호조참판 김옥균/전후양영사(前後兩營使) 겸 한성판윤(漢城判尹) 박영효/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신기선(申箕善)/좌우(左右) 양영사 겸 서리외무독판 서광범/외무아문참의 윤치호/ 승정원도승지 박영교(朴泳敎)/병조참판 겸 정령관 서재필 등 개화파를 임명해 정부의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리고 급진 개화파 만으로는 힘들다고 보고 온건 개화파이면서 정변에 반대하지 않던 김홍집을 한성부 판윤으로, 김윤식(金允植)을 예조판서로 임명했다.

신 정부 각료의 구성은 개화파와 국왕 종친의 연립 내각으로 일부 반발이 있었지만 개화파 지도부는 새 정부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임시적이라도 종친을 중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12월 6일 개화파는 정강 정책을 발표하는데 주요 내용은 청과의 사대관계 단절, 문벌과 양반 제도 폐지, 지조법 개정과 재정기관의 일원화, 보부상 단체인 혜상공국(惠商工局) 폐지 등이다. 3일만에 정변이 수포로 돌아가고 고종의 조서는 바로 폐기되어 본래 이들이 내놓은 개혁 정강의 수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혁신 정강의 조항은 상당히 많아 일본인의 기록에는 80여 개 조항에 달했다고 하지만 이들의 개혁 시책 중 14개 조항만이 김옥균의 일기인 《갑신일록》에 전하고 있다.


[참고: 김옥균의 ‘갑신일록’에 적힌 혁신 정강 14개 조항 내용]

대원군을 즉각 환국케 하고 청나라에 대한 사대,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고, 실력과 재능에 의해 인재를 등용할 것.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리(奸吏,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들을 근절하고 궁민(窮民)을 구제하며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전후 국가에 해독을 끼친 간리(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각 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폐지할 것

규장각을 폐지할 것.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혜상공국을 폐지할 것.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죄의 경중을 묻고, 무고한 죄인은 석방시킬 것.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은 왕세자로 임명할 것.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戶曹)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중앙 재무관청은 금지, 혁파할 것.

대신과 참찬은 매일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政令)을 의정, 시행할 것.

의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혁파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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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3일 천하

정변 직후 입궐하다가 달아난 민씨 세력은 민비와 비밀리에 연락하고,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불바다가 된 도성과 개화당의 갑작스러운 정변에 놀란 청나라 측은 부상당한 민영익을 보고 사태가 발생했음을 확인, 12월 5일 아침 일찍 개화당의 지지자로 위장한 심상훈(沈相薰)을 경우궁으로 들여보내 왕비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병력 파견을 허락할 것을 제의하고 민비는 청군에게 지원 요청을 한다.

이어 민비는 고종에게 갑자기 경우궁이 좁아 생활하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창덕궁으로 다시 환궁하자고 하고 고종은 이를 지지하지만 김옥균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개화파가 이끄는 소수의 병력으로는 미구에 닥칠 역적들에게서 방어하기 극히 불리하다며 안정될 때까지는 반대한다는 의사를 보인다. 하지만 고종의 명에 거역할 수 없어 고심하다가, 경우궁 옆의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桂洞宮)으로 국왕과 왕비의 거처를 옮기는데 이재원의 집은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보다는 넓었지만 궁궐보다는 규모가 적어 개화파의 소수 병력으로도 창덕궁보다는 쉽게 방어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계동궁에서도 민비는 계속해서 창덕궁 환궁을 요구하였고, 왕비의 부탁에 고종은 창덕궁으로 가자고 했다. 김옥균은 병력이 소수임을 들어 방어에 불리하다며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그런데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일본군 병력이면 청나라군의 공격도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5일 오후 5시 고종과 왕비 일행은 창덕궁으로 환궁하였다.

12월 6일 오후 3시경, 고종이 혁신 정강을 결재하고 혁신정치를 천명하는 조서를 내렸다. 개혁 정치 실시 조서를 내릴 무렵, 청나라군은 흉도들에게 납치된 왕과 왕비를 구한다는 포고령을 내린 뒤 포탄을 쏘며 1,500명의 병력을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 창덕궁의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각각 공격하여 들어와 창덕궁과 창경궁 후원 일대에서 외위를 담당한 친군영 전후영의 조선 군을 패퇴시켜 버리고 중위를 담당한 일본군 역시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철병하여 버렸다. 5백 명의 군사를 동원하기로 한 함경남도병마사 윤웅렬 역시 1백 명도 안되는 남병영 군사를 이끌고 왔지만 쉽게 밀리고 말았다.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사태가 불리해지자 재빨리 철수해 버렸다. 고종은 박영효·김옥균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성황후가 있는 북관묘(北關廟)로 돌아갔는데 이때 박영효의 형 박영교, 홍영식은 끝까지 왕의 곁에 남아있다가 청군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결국 개화파 정권은 청군에 의해 3일천하로 끝나고 만다.

11. 결과

홍영식과 박영효의 형 박영교는 고종을 북관종묘까지 호위하다가 청군에게 죽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邊樹)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갑신정변 직후 조선 정부는 이 사건을 역모로 규정하였고, 갑신정변 주모자들을 대역죄인으로 공표하고 서재창·이희정·김봉균·신중모·이창규·이윤상·오창모·차홍식·남흥철·고흥종·이점돌·최영식을 처형하였다. 국내에 남은 다른 개화파들은 민비 척신 세력에 의하여 철저히 색출되어 수십 명이 피살되고, 개화당은 몰락하였다.

관련자로 지목된 김옥균의 처는 관노가 되기 전에 딸과 함께 음독 자결하고, 서재필의 아버지 서광효 내외와 맏형 등은 음독 자결하였다. 박영효의 아버지 박원양은 판서직에서 해임된 뒤 투옥, 옥사하였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박원양은 감옥에서 거적(볏짚)을 뜯어먹다가 굶어서 아사했다 한다.

이후 박정양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상재는 주동자는 아니었으나 우정국의 직원으로 박정양의 후원 하에 개화파 정치인으로 활약한 점과 홍영식과의 친분 관계를 이유로 스스로 사직하고 낙향한다.

무엇보다 갑신정변의 가장 큰 후유증은 조선에서 청의 세력이 강대해지고 청·일 두 나라의 조선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고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된다는 점이다.

일본의 힘을 빌리려 한 이들 개화파는 결국 친일 사대정신을 갖고 있었고 이 사건은 이후 일본이 조선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게 한 구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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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실패한 이유

정변 직후 민중들은 이들에게 호응하지 않앗는데 이유는 일본이 조선에 침투하는 방법으로 내정 개혁을 외쳤고 그런 영향으로 당시 민중들은 개화파의 근대화 정책이 일본의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준비도 많이 부족했는데, 거사와 민심 동요, 사태 수습 등에 쓸 자금을 사전에 충분히 마련하지 못했으며 온건 개화파를 적으로 돌렸고, 척신 세력이나 수구파 대신, 혹은 남인 등 타 정파의 인물을 포섭하지 못한 것도 세력 확장에 장해물이 되었다. 인원도 매우 부족했는데 개화파의 정책을 지지하는 이는 북학파 출신이었던 일부 유학자들과 일부 외교관과 청나라, 만주, 일본, 월남 등에 사절로 다녀온 일부 통역관과 수행원들이 고작이었다.

또 당시 서울의 상인과 빈민들은 개화파에 강한 적대감마저 품고 있었다. 자신의 생활기반을 위협하던 일본과 밀착했던 개화파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고 일본인들과 서양인들이 조선인들을 죽이고 잡아먹는다, 아녀자를 노리개감으로 삼는다는 유언비어들이 상당히 퍼져 있었던 것도 개화파에 대한 반감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양반 기득권들의 반발은 더 컸다.

개화파는 집권 직후 임오군란과 각종 문제의 원인이 된 방납과 선혜청을 폐지하려 했지만 고종이 쉽게 허락하지 않아 폐지하지 못했고 문벌과 양반 등 신분제도 폐지와 과거 제도 폐지 조항은 지방 유생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규장각을 폐지하자는 주장은 개화파에게 내심 동조하고 있었던 북학파 출신 지식인과 중인 계층에게도 반감을 사게 된다. 무엇보다, 개화를 해야할 민중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 이는 이들을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제정 신분제를 청산한다고 했지만 신분제도를 완전히 철폐하지는 못했고 지주전호제를 유지하는 지조법의 개혁은 종래의 지주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들 지주들에게 착취를 당하던 당시 민중의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이들 급진 개화파는 조선을 개혁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제대로 된 준비와 당시 조선인들의 삶과 생각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했고, 제대로 알려는 노력 또한 하지 않았던 것이다.


13. 역사적 의의

고대 이후 중국에 반 속국화된 사대교린의 종속적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화 하려 한 점과 왕에 의한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한 점 등을 들어 중세 봉건 국가체제를 청산하고, 신분제도의 철폐를 주장하고 부패의 요인을 제거,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한 적극적인 자주 근대화 운동과 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14.평가

준비 부족과 미수함은 있지만 개혁을 하려한 점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혁운동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은식은 갑신정변을 혁명으로 규정하고, '갑신독립당의 혁명실패'를 한국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규정했다. (박은식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제1장 '갑신독립당의 혁명실패'에서)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한 점은 최대의 단점으로 비판받고 있는데 이는 급진 개화파가 농민이나 상인의 지지를 얻으려는 어떤 구체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고 외세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반청 의식만 강했을 뿐히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받는다.

훗날 서재필도 정변의 실패 이유로 두 가지를 지적했는데 첫 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했다는 것을 꼽았다.

윤치호, 유길준, 박중양 등은 정변 실패에 대해 민중들이 혁명을 이해할 만큼의 지적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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