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조선후기 이인좌의 난(李麟佐亂) 내용과 영향

올드코난 2016. 3. 2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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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는 여러가지 콤플렉스가 있었다. 무수리의 딸이라고 하는 혈통문제가 가장 컸고, 지지세력인 노론의 왕이라는 비아냥과 의붓형인 경종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심등이다. 이런 것들이 영조 재임중 큰 부담이 되었는데, 이인좌의 난도 이런 배경이 있다. 정리해 본다.

조선후기 영조시대 초기 최대 위기였던 반란 사건, 이인좌의 난(李麟佐亂; 무신난(戊申亂);영남란(嶺南亂)의 내용과 결과


1.개요

영조4년 1728년 3월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며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일부가 연합해 일으킨 반란으로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이인좌는 선조 때 붕당을 예견했던 명재상 이준경의 후손이자 남인 윤휴의 손자사위여서 영남 유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2.배경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은 후사가 없었다. 이에 노론에 의해 연잉군(영조)가 세제되는데, 노론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양위하라는 말도 서슴치 않는다. 소론은 경종의 보호를 명분으로 신임사화를 일으키지만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즉위한다. 영조는 신임사화의 옥사를 문책하게 되면서 노론의 지위가 회복되고 다시 집권하고, 노론 4대신을 무고한 바 있는 소론파 김일경·목호룡이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노론과 소론의 서로에 대한 증오심은 매우 깊어졌다.

이런 정치적인 배경 외에도 조선 말기 계급이나 서얼출신, 몰란한 양반 등등 차별을 받았던 이들의 불만 또한 표출된 것이다.



3.계획과 준비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후 박필현(朴弼顯) 이유익(李有翼) 심유현(沈維賢) 등 과격 소론측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한다. 명분은 경종의 죽음에 대한 배후가 영조와 노론이며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웠다. 그리고 영조를 폐위하고 밀풍군 탄(密豊君坦 소현세자의 증손자)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계획한다.

이런 계획으로 모반을 정당화하고 민심을 규합시키는 데 이용되고 1725년부터 사람을 끌어 모으기 시작하고 반란군을 편성한다.

그리고 1727년 정미환국으로 온건 소론이 다시 기용되는데 이는 오히려 강건 소론들의 동조자의 확대가 어려워지는 결과가 되어 모의가 노출되어 영조에게도 보고가 되는데, 이에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삼군문에 호위를 명하는데, 이런 상황이 결국 난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4.반란의 진행

1727년(영조 3년) 음력 7월 1일 노론의 일부가 실각함을 보고, 이듬해 음력 3월 이인좌 김영해 정희량 박필현 등이 주동이 되어 밀풍군 탄(坦)을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는 청주를 습격해 충청병사(兵使) 이봉상을 죽이고 병졸을 모아 스스로 대원수(大元首)라 칭하며 사방으로 격문을 돌렸다.

격문에는 경종의 죽음은 영조와 노론 세력에 의한 독살이고, 연잉군(영조)은 숙종의 왕자가 아니라고 주장했고 왕대비의 밀조를 받아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 탄(坦)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반군은 초기에는 기세가 등등해 보였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반란의 소식을 들은 조정은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을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박찬신(朴纘新)을 도순무중군(都巡撫中軍)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난의 토벌에 나섰다.

3월 24일 안성·죽산의 반군을 소탕하고, 이인좌·권서봉·목함경(睦涵敬) 등을 생포하였다. 안성·죽산에서의 반군의 패보는 삼남 지방의 반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청주를 거쳐 4월초 추풍령을 넘었을 때에는 영남 지방의 반군도 지방 관군에 의해 이미 소탕되었다. 관군은 거창에서 회군해 4월 19일 개선하고, 영조는 친히 숭례문루에 나가 영접했다.


5. 영향 및 결과

난의 평정에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주모자의 대부분이 소론이었기 때문에, 이후 정국의 주도권은 노론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영조의 탕평책은 명분을 얻게 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취약했던 왕권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이인좌의 난으로 영남지역은 조선 후기 정치에서 소외되는데,이유는 남인들의 고장 영남에서 동조를 한 자들이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안동 등 일부 지역의 사대부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거사에 마음이나마 동조을 한 것이 분명했기에 이에 영남지역은 북쪽 지역과 더불어 정계에 진출하는 데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난이 평정된 후 영조가 경북 대구부의 남문 밖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웠는데 이는 영남을 반역의 마을로 규정 영남을 차별하게되는 근거가 되었다.


마무리하자면 이인좌의 난은 영조의 최대 위기였지만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왕권 강화에 적절하게 이용된 사건으로 당시 조선시대의 문제점을 노출시켰지만, 해결을 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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