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한신교육투쟁(阪神教育鬪爭) 설명 [재일 조선인 민족교육투쟁 한신교육사건 의미]

올드코난 2017. 4. 13. 17:38
반응형

한신교육투쟁(阪神教育鬪爭)은 일본에서는 한신교육사건(阪神教育事件)이라고도 불리며 조선인 학교사건, 오사카에서는 오사카 조선인 소요사건, 고베에서는 고베 조선인 학교 사건 등으로 불린다. 재일조선인과 일본 공산당이 1948년 4월 14일부터 4월 26일까지 (혹은 3.24~5.3) 일본 오사카부와 효고현에서 벌인 민족교육투쟁이다. 이 사건으로 연합군최고사령부는 전후 유일하게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정리해 본다.


1. 배경

2차 세계대전 종전후에도 일본에는 강제로 끌려온 많은 한국인(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 재일 조선인들의 아이들은 전쟁과 황민화교육으로 조선어를 읽고 쓰기가 어려웠다. 이에 뜻있는 조선인들은 독자적으로 제작한 한글 교재를 만들고 일본 각지에 국어 강습회를 개최한다. 국어 강습회는 재일본조선인련맹(약칭 조련) 사무소나 공장 철거지, 현지의 초등학교 교실 등을 빌리며 열렸다. 국어 강습회는 조선인 학교로 개편되어 갔다고 전국에 500여개 학생수는 6만여 명에 이르게 된다.


2. 조선학교폐쇄령

일본을 관할하던 연합군최고사령부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쇼와 22년 1947년 10월 일본 정부에 재일조선인을 일본의 교육기본법, 학교교육법에 따르게 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3개월후인 1948년 1월 24일 일본 문부성 학교국장은 각 도부현 지사에 ‘조선인 설립 학교 취급에 대해서’라는 통지를 내려 조선인 학교를 폐쇄하고 학생을 일본인 학교로 편입시키도록 지시를 하는데 이것이 조선학교폐쇄령으로 오사카 부와 효고 현은 이 통지를 근거로 조선학교 폐쇄를 명령했다. 한신 지역에서는 조련 송성이 투쟁에 참여했고 재일 조선인 중 당시 16세였던 김태일이 경찰에 사살되고 만다.


3. 사건 전

몇일후 1월 27일 조련(재일본조선인련맹)은 제13회 중앙위원회를 개최해 조선 학교 폐쇄령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을 밝히고 '3·1 독립운동투쟁 기념일'에 맞추어 민족 교육을 지키는 투쟁을 전국에서 전개할 것을 호소한다.


4. 사건 발생

재일조선인 민족교육의 탄압이랄 수 있는 학교폐쇄에 대해 반대투쟁 중 처음으로 크게 일어났던 곳은 야마구치현(山口縣)으로 당시 야마구치현에는 귀환하려는 조선인 1만 명 이상이 모여 있었다. 야마구치현 지사는 3월 31일까지 학교를 폐쇄한다고 통보하고 이에 조선인들은 야마구치 현청 앞에 모여 교섭과 철야시위 투쟁을 전개하고 결국 야마구치현은 통첩의 철회를 인정한다.

블로그 올드코난 갈대의 지혜와 나무의 의지를 갖고 글을 쓰겠습니다. 



5. 사건의 확대

4월에 들어서는히로시마(廣島), 오카야마(岡山), 효고(兵庫), 오사카 등지에서 투쟁이 진전되는데 효고현과 오사카부 2곳을 나누어 살펴 보면

(1)효고현

1948년 4월 10일 효고현지사 키시다 유키오(岸田幸雄)는 조선인학교에 대해 봉쇄 명령을 내리고 4월 14일 조련은 효고현청을 방문해 키시다 유키오와의 교섭을 요구했다. 4월 23일 경찰과 헌병은 조선인학교 나다교(灘校)와 히가시고베교(東神戸校)를 봉쇄하고 4월 24일 조선인학교에 대한 전날의 조치에 항의하는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이 효고현 현청 앞에 모여 오전 9시 30분 효고현청 지사실에서 키시다 유키오, 고데라 겐키치(고베 시 시장), 검사정 등 15인은 조선인학교 폐쇄 가처분 집행 문제와 재일 조선인의 항의 집회 대책을 협의했다. 조련은 효고현 지사실에서의 밀담의 정보를 입수해 약 100명의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이 효고현청 내에 진입해 비품 등을 파손하고 벽을 깨어 지사실에 진입해 키시다 유키오와 헌병을 감금했다. 전화선을 절단해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학교 폐쇄령의 철회, 조선인학교 폐쇄 가처분의 취소, 조선인학교 존속의 승인, 체포된 조선인의 석방 등을 키시타 유키오에 요구하고, 오후 5시 경, 키시다 유키오는 학교 폐쇄령의 철회, 조선인 학교 폐쇄 가처분의 취소, 조선인학교 존속의 승인, 체포된 조선인의 석방 을 약속했다. 오후 10시 경, 키시다 유키오, 요시카와 효고현 부지사, 이치마루 검사정, 타나베 차석검사, 이데이 효고현 경찰장, 후루야마 고베시 경찰국장 등은 점령군 효고현 군정부에 모여, 오후 11시 경, 효고현 군정부는 '비상사태 선언'을 발령했다. 이에 전 경찰관은 미군 헌병 사령관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미군은 효고현청에 진입한 사람들을 철저히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키시다 유키오가 약속한 '학교 폐쇄령의 철회', '조선인 학교 폐쇄 가처분의 취소', '조선인 학교 존속의 승인', '체포된 조선인의 석방' 등은 사실상 무효가 되었다. 다음날 4월 25일 이른 아침 미군 헌병과 일본 경찰관은 효고현청에 진입한 사람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4월 28일, 비상사태 선언이 해제된다.

4월 25일부터 4월 29일까지 효고현에서는 1590명 혹은 7295명이 검거되었고 일본 공산당 고베 시 시의회 의원인 호리카와(堀川一知)도 검거되었다. 검거된 사람 중 주요 인사 23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일본인 호리카와는 중노동 10년을 선고 받았다. 재일조선인은 최고 중노동 15년을 선고받아 형기 종료 후 본국에 강제송환 되었다.

(2)오사카부

1948년 4월 23일 오전 9시 오사카부 오사카 성 앞의 오테마에 공원에서 재일조선인과 일본 공산당 관서지방위원회의 일본인 등 7000여명이 조선인학교 탄압반대 인민대회 집회를 개최했다. 집회 참가자들 중 대표자 16명이 선출되어 오사카부 청사에서 오사카부 지사와 교섭을 실시하는데 오후 12시 30분 오사카부청 지사실에서 자리없던 지사를 대신해 오사카부지사와 조선인 대표자 16명이 교섭을 시작하지만 합의에 실패한다. 오후 3시 집회 참가자가 동시에 구호를 외치고 청년 50여 명이 행동대를 편성해 스크럼(scrum)을 짜고 오사카부청 앞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이어 시위대 7000여 명이 오사카부청에 진입해 3층 복도까지 점거하고 부지사는 경찰관의 유도에 따라 전시에 만들어져 있던 지하도를 통해 탈출했다. 오후 5시 경 일본 공산당 오사카지방위원회에 파견되어 있었던 마스야마 타스케(増山太助)는 가와카미 간이치(川上貫一) 중의원과 함께 지사실에서 막으려 했지만 시위대는 지사실에 진입해 집기를 파손한다. 이날 밤 오사카성 주변의 각처에서 재일조선인과 일본 공산당 관서지방위원회의 일본인은 봉화를 피웠다.

이날 조련은 가와카미 간이치(川上貫一)를 대표로 교섭 장소를 만들려고 했지만, 미군과 무장 경관이 배치되어 무산되고 재일조선인과 일본 공산당 관서지방위원회의 일본인 등은 무장 경관대와 충돌 재일조선인 1명이 사망하고 재일조선인 20명이 부상, 경찰관은 31명이 부상당한다. 이로 인해 179명이 소란죄로 검거되었다.

4월 25일, 조련과 일본인 약 300여 명이 오사카 남경찰서에서 체포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경찰은 위협 사격을 가해 해산시킨다. 다음날 4월 26일 조련은 오사카 히가시나리 구·아사히 구 등에서 조선인학교 탄압반대 인민대회를 개최하고 오후 조선인 대표자와 오사카부 지사는 다시 교섭을 벌이지만 오후 3시 40분 별실에 대기하고 있던 오사카 군정부의 크레이그 대령이 교섭 중지와 오테마에 공원에 집결하고 있던 재일조선인 2만 명의 해산을 명령했다.

재일조선인 1600여 명이 다시 오사카부청으로 향했다. 시위대는 무장 경찰의 저지선을 향해 돌을 던졌다. 무장경찰은 소방차로 물을 쏘고 권총으로 발포하고 이로 인해 재일조선인 1명이 사망했다. 검거된 사람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일본인 9명과 재일조선인 8명이 중노동 4년 이하를 선고받았다. 이후 오사카시 경찰국은 미국 육군 제25사단 사령부로부터 감사장을 증정 받았다.


6. 결과

1948년 5월 5일, 조련의 교육대책위원장과 문부대신 사이에 "교육기본법과 학교 교육법을 준수한다, 사립학교의 자주성의 범위 안에서 조선인 독자적인 교육을 인정하고, 조선인 학교를 사립학교로서 인가한다"라는 내용의 각서가 교환되고 지켜지는 듯 했지만 다음해 1949년 10월 다시 학교 폐쇄명령이 내려지면서 전국 대부분의 조선인학교가 폐쇄되고 만다.


7. 사건 의미

연합군최고사령부와 일본에 의해 강행된 조선의 학교 폐쇄명령은 일본내 조선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사전에 모의된 것으로 이는 미국과 일본이 실질적인 우방국가이며, 조선(한국)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조선의 학교 폐쇄명령으로 발생한 한신교육투쟁(阪神教育鬪爭)은 일본과 미국 입장에서는 소요사건으로 여기지만 조선인 입장에서는 반일 투쟁이며 민족 투쟁으로 볼 수 있다. 또 조선인과 함께한 일본 공산당과의 연대는 이념과 민족을 넘어 섰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많은 조선인들이 북한 공산당에 호의적인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는 점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으로 일본내 조선인들은 더 이상 일본인의 식민지인이 아니라는 자부심이 커지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에 재일본조선인연맹은 4월 24일을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킨 ‘교육투쟁 기념일’로 정하게 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