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4.19 도화선 김주열 (金朱烈) 열사 설명

올드코난 2017. 4. 2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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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김주열(金朱烈, 1944년 10월 7일 ~ 1960년 3월 15일) 열사에 대해 정리해 본다.


김주열은 1944년 10월 7일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서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 사이의 3남 2녀 중 넷째 (아들로는 둘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태종은 해방기 면장을 지냈고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꾼 부자로로 김주열은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당시에 귀한 사진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성격은 차분했으며, 책임감이 강하고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1956년 용지국민학교(현 금지동초등학교) 졸업, 1959년 남원 금지중학교 졸업(6회)후 진주고등학교에 합격했지만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반해 남원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몇 달을 다니다 말았고 재수를 한다. 1960년 초 서울 YMCA 고교 입시학원에 다니며 공부하는데 당시 아버지가 병환으로 가계가 기울어 합비가 들지 않는 철도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봤지만 실패하고 형의 친구 하용웅의 권유로 은행원으로 취업할 수 있는 마산상업고등학교(현 마산용마고등학교)에 원서를 내게 된다.


합격자 발표는 1960년 3월 14일 예정이었지만 3.15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한 교육청은 3월16일로 합격자 발표를 연기했고, 김주열이 사건 당일 마산에 있던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었다.

1960년 3월 15일 하용웅의 담임 선생을 통해 합격했다는 것을 확인한 김주열이 그날 바로 집에 돌아 오지 못했는데, 당시 교통편은 마산에서 남원까지 하루가 걸렸고 첫차를 타지 못하면 중간에 유숙을 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날 첫차를 탔다면 그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운명의 그날 1960년 3월15일 마산에서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학생들로 이루어진 평화적 시위대가 이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인 '마산데모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의 무차별 체포와 발포로 희생자가 발생하고 이에 시위대는 격분하고 마산 남성파출소와 북마산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 등을 습격하는데 이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는 등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주모자로 구속된 26명은 공산주의자라는 몰려 고문을 받았다. 


김주열은 바로 이날 행방불명 되는데 그 과정을 보면 민주당 지지자였던 이모할머니가 투표 통지표가 전달되지 않아 울분을 터뜨리고 있던 중 마산에서 부정선거가 들통난 시민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이에 이모할머니가 집으로 와 김주열과 김광렬 형제에게 시내에 나가 보라고 하고, 이에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했다 김주열이 행방불명되고 만다. 김주열의 어머니가 마산으로 가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실종 27일 후인 김주열의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던 시간이었던 4월 11일 11시경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눈에 최루탄이 박힌 변사체로 한 낚시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이 소식은 부산일보 허종 기자의 기사로 알려지게 되고 마산 시민들은 분노하고 바로 그날 4월11일 2차 의거가 시작된다. 이는 부산과 광주를 거쳐 전국으로 번지게 되고 4울18일 고려대학생 시위와 4·19 혁명으로 이어지고 결국 이승만이 하야를 하게 된다.


외과의사가 사체 검안 결과 사인은 미제 최루탄(길이 17㎝, 폭 3㎝)이 안부에 박힌 것으로 판명되었다. 김주열의 시신은 1960년 4월 13일 밤 마산을 출발하여 이튿날 아침 고향인 전북 남원군 금지면 용정리의 마을 선산에 묻혔다. 사후 1995년 4월11일 마산상고에서 김주열에게 명예 졸업장을 추서했고, 사후 50년 만인 2010년 4월 11일 마산중앙부두에서 김주열을 기리는 범국민장이 거행되었다. 김주열 열사의 묘는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 국립 3.15 민주묘지에 있으며 실묘는 그의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우비산 자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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