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친일파 윤치호 (尹致昊)와 이름이 같아 잊혀지는 교육자 윤치호 (尹致浩)

올드코난 2014. 1. 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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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전] 어린시절 우연히 들었던 윤치호란 이름은 약간의 혼돈이 있었다.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이며, 친일 인물이라는 모순된 인물이었다. 사실 윤 씨 집안 상당수가 친일 후손이라는 주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여기서 소개하는 인물은 윤치호라는 한글 이름이 같아서 잊혀진 그리고 이 기회에 바로 잡아야 할 교육자 윤치호(尹致浩)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본다. (출처:위키백과 * 거의 모든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친일파 윤치호(尹致昊)와 이름이 같아 잘 모르는 그래서 잊혀지는  목포의 공생원 설립자 윤치호(尹致浩) 그리고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본인 '한국 고아의 어머니' 고 윤학자 여사

 

 

우선 이름이 같은 친일파 윤치호(尹致昊, 일본식 이름: 이토 지코 (伊東致昊))는 해평 윤씨(海平 尹氏)다. 고려 말기 관리 윤군정(尹君正)을 시조로 하는 후손들로 해평은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지명이다.

 

계파로는 문영공파(文英公派), 충간공파(忠簡公派), 평도공파(平悼公派), 오음공파(梧陰公派), 월정공파(月汀公派), 치천공파(稚川公派), 장주공파(長洲公派), 백사공파(白沙公派), 군의공파, 팔공사직공 등이 있다. 선조시대 정승 형제를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다.

 

해평 윤씨의 최근 인물들은 대부분 친일 사전에 이름이 올라있다. 4대 대통령 윤보선 또한 해평 윤씨다.

 

그리고 윤치호와 한글 이름은 같지만 다른 인물인 교육자 윤치호(尹致浩) 님은 파평 윤씨(坡平尹氏) 후손이다.

 

고려 태조 태조 왕건을 도와 건국의 공로로 벽상삼한익찬공신 2등 삼중대광 태사 직을 받은 윤신달(尹莘達)893?(진성여왕 7년)~973년 (광종 24년)의 후손이다. 고려 시대 유명한 윤관(尹瓘)이 파평 윤씨다. 조선 시대 여러명의 왕후를 배출하기도 했다.

특히 윤봉길 의사가 바로 파평 윤씨다.

 

교육자 윤치호(尹致浩) 님에 대한 이력을 간략히 살펴보자 (위키백과 내용 임)

윤치호(尹致浩, 1909년 6월 13일 - 1951년 1월 26일)

1909년 6월 13일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상옥리 옥동부락 출생, 윤영대와 권채순의 장남. 옥동부락에 정착한 파평윤씨 문중의 종손으로 태어났으나, 몰락하여 소작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환경으로 전락했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1923년 14세에 아버지 윤영대가 과로로 사망하면서 소년가장이 되었다.

거지와 비슷한 처지의 그를 본 한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1924년 함평의 개척교회인 옥동예배당의 미국인 기독교 여선교사 율리아 마틴(Jullia Marthin)이 그를 받아들여 곧 자신의 조수로 채용하였다. 마틴 선교사의 후원으로 경성부의 피어선 성경학당에 입학하였다.

3년 뒤 피어선 성경학당을 마치고 목포로 내려와 전라남도 최초의 개척교회인 양동교회에 다니며 전도사로 활동한다.

1928년 가난하고 불우한 고아들을 여러 명 데려다가 양자, 양녀로 키우기 시작한 것이 확대되어 고아원인 공생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각지의 고아들을 데려다가 기르던 중, 1938년 일본 여성 다우치 치즈코(大內田學子)를 만나 그녀의 청혼을 받고 그해 10월 15일 결혼한다. 다우치 치즈코는 이름을 윤학자로 바꾸고 그의 아내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 후반 일본인에게 가해지던 편견을 인내하며 남편의 사업을 도왔다.

 

윤치호 님은 해방 뒤에도 계속 고아원을 운영하다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1951년 1월 26일 전남도청에 식량지원을 요청하러 광주에 내려갔다가 실종되었다.

 

윤치호 님 부인이신 윤학자 님에 대해서도 잠시 알아 봅시다.

[윤학자님의 대한 간략한 소개 및 설명]

1912년 일본 고치시 출생, 일본 이름 다우치 치즈코(大內田學子)

1919년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던 부친을 따라 목포로 건너와 유달초등학교와 목포여고를 졸업. '목포 거지왕' 윤치호 (남편)가 세운 공생원에서 평생 아이들을 돌보왔다.

해방 후 반일감정도 심해졌지만 아이들을 향한 그의 사랑은 한결 같았다. 윤치호씨와 결혼해 일본 이름을 '윤학자'로 바꿨고 친자식들을 공생원의 고아들과 함께 키웠다.

6ㆍ25 전쟁 당시 식량 배급을 받으러 나갔던 남편이 행방불명돼 윤학자 여사 혼자 400명의 고아들을 책임져야 했고. 일본에서 가져온 오르간, 기모노 등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아 고아들을 보살폈다. 그녀의 손을 거쳐간 고아는 3,000여명에 달했다.

윤 여사의 이러한 공로를 인정한 정부는 63년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68년 10월 31일 공생원에서 생을 마감했고, 당시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으로 장례가 거행되고 3만 명의 조문객이 방문했다

한국 고아의 어머니이자 성녀로 남아 많이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2012년 10월 30일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윤 여사에 대한 평가와 그녀에 대해 이야기는 많지만 정작 윤 여사의 남편이신 윤치호 님에 대한 말들이 잘 없어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친일파 윤치호 (尹致昊)에 대한 검색만 나와 아쉬움이 큽니다.

 

이름이 같아 잘 몰랐던 교육자 윤치호(尹致浩)님과 친일 매국노 윤치호(尹致昊)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 알아 주세요. 

그리고 윤학자 여사님의 숭고한 사랑 또한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한국인에 매국노도 있고 애국자도 있습니다.

리고, 나쁜 일본인도 있도 훌륭한 일본인도 있습니다.

윤치호라는 같은 한글 이름에 서로 다른 삶은 살아간 두 인물을 보면서 사람됨은 국적으로 논할 문제가 아닌 듯 싶습니다.

 

글 작성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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