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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18

백범 김구 선생 일대기 (약력) - 출처 백범일지

백범 김구 선생 (김창수): 독립운동가 출생:1876.8.29(음7.11) ~1949.6.26서거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 일대기(약력) - 출처 : 백범 일지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빈농의 김순영의 외아들로 태어남. 어머니는 곽락원이며 당 17세. 아명은 창암. 1879년 천연두를 앓음. 1880년 집안이 강령 삼거리로 이사하다. 1884년 조부상을 당함. 국문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다. 1887년 집에 서당을 만들고 이생원을 초빙하여 한문 공부를 하다. 1889년 "통감", "사략" 등의 병서를 읽음. 1890년 학골 정문재의 서당에서 "당시", "대학", "과문" 등을 배우다. 1892년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매관매직의 타락한 과..

삼일절 3·1 운동. 국민들은 순수했고, 주동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삼일절은 쉬는날? 대체근무일? 3·1 운동 제대로 알아 봅시다. 3·1 운동 민족대표 33인들은 모두 다 존경받을 인물들이었는가? 3·1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모두다 순수한 애국자들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 같이 생각해 봅시다. 삼일절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들은 종교인들이었다. 국민들은 순수했고, 주동자들이었던 종교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우선 3·1 운동에 대해 간략히 알아 봅니다. (글출처: 위키백과) 1.개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 이하 3·1 운동)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뺏긴 조선의 국민들이 자주독립을 외쳤던 첫 번째 비무장 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독립운동 또는 3·1 인민봉기라고도 부른다. 3·1 운동을 주도한 ..

동양사 연표

동양사 연표 고대 - 중세 - 근대 - 현대 [기원전] 10000년 북이라크에 중석기문화의 샤니다르 B층 유적. 8000년 북이라크의 카림 샤히르 유적. 최초의 농경˙목축 단계. 6800년 북이라크의 야르모 유적에 나타난 촌락생활. 팔레스티나의 예리코에 대취락 발전. 5800년 하스나 사말라기(期) 시작. 서아시아 구릉지대에 농경문화 확대 및 안정. 5100년 서아시아 구릉지대에 할라프기 시작. 촌락문화 현저하게 발달. 5000년 중국 산시성[陝西省]에 중석기시대에 속하는 사원(沙苑)문화. 4300년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전기 우바이드문화 발생. 4000년 황하의 중류 유역 채도계(彩陶系)의 양사오[仰韶]문화, 농경문화 발전. 3900년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후기 우바이드문화 시작. 촌락이 발전. 3300년..

역사/세계사 2012.06.25

왕 [王, king] 유래 설명

왕 (군주제) [王, king] 유래 설명 한 국가 또는 한 지역의 최고 통치자. 출처: 브리태니커 일정한 지역을 다스리는 군주로 그 위에 황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세속적 통치자보다 지위가 높았다. 영어문화권에서는 일반적으로 'king'을 사용하며, 한국에서는 이를 '왕' 또는 '임금'이라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용례를 보면 이탈리아에서는 고대 로마 이래 'Rex'가 왕을 뜻하는 말로 상용되는 등 명칭에 있어서 언어와 역사전통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세계적인 현상의 하나인 왕위는 중세 독일처럼 선출되기도 하나 보통 세습적이며, 두 왕이 공동으로 다스린 고대 스파르타의 양두정치도 있으나 대체로 단일군주제의 형태였다. 왕은 국민과 신 사이의 매개자로 여겨졌고, 고대 수메르에서와 같이 신..

역사/세계사 2011.06.17

己未 獨立 宣言書 (기미독립선언서) 원문

己未 獨立 宣言書 (기미독립선언서) 宣 言 書 ( 선 언 서 )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半萬年(반 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역사) 중학생,고등학생을 위한 세계사 정리 - 중국 왕조의 시대순 변천사 정리

[중국 왕조의 변천] 간략하게 정리 춘추 전국 시대(B.C.770--B.C.221) 봄, 가을(춘추, 전국시대) 로: 살살 춥다(B.C.770) 진(B.C.221) 짐(진): 나눌 것(B.C.221) 한(B.C.202--A.D.8) 한(한) 많은: 노처녀(B.C.202) 시(8--23) 신(신): 인(8) 후한(25--220) 후한(후한): 뇌물(25) 삼국시대(220--265) 삼국(삼국시대)으로: 날 납치(220) #1 위(220--265) 위(위) 족으로: 날 납치(220) #2 촉(221--263) 촉(촉) 박하지 않고: 늘 느긋(221) #3 오(222--280) 오(오): 니나노(222) 서진(265--316) 부서진(서진): 내 보물(265) 5호16국(316--439) 16개국(5호16국)..

역사/중국 2010.07.28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20 끝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 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 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 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맛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의 정치 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을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 나라의 독특한 좋은 제도를..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9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그러나 모든 계급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이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 중에서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었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었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쳤다. 우리 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직권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8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근래에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 나라를 어느 큰 이웃 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 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 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댄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7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세 번째 길로 나는 윤봉길 의사의 본댁을 찾으니 4월 29일이라, 기념제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나는 일본 동경에 있는 박열 동지에게 부탁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 열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 오게 하고,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는 날 나는 특별 열차로 부산까지 갔다. 부산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분의 유골을 모신 열차가 정거하는 역마다 사회, 교육 각 단체며 일반 인사들이 모여 봉도식을 거행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자 유골을 담은 영구를 태고사에 봉안하여 동포들의 참배에 편케 하였다가 내가 친히 잡아 놓은 효창공원 안에 있는 자리에 매장하기로 하였다. 제일 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남기고 그 다음에 세 분의 유골을 차례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날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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