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

고려 왕규의 난, 왕식렴과 정종(왕요)의 음모가 아닐까

올드코난 2015. 3. 12. 13:20
반응형

승자의 왜곡된 역사의 기록. 고려 왕규의 난, 왕식렴과 정종(왕요)의 음모가 아닐까


-우선 역사에 기록된 내용을 정리해 본다.


1.왕규의 음모

왕규는 고려 초기 광주(廣州)의 대호족으로, 양근 함씨였으나 개국공신으로 왕씨 성을 하사 받게 된다. 고려 태조 당시 벼슬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태조는 왕규의 두 딸을 맞아들여 제15비(妃)와 제16비를 삼았다. 제16비가 아들을 낳았는데 광주원군(廣州院君)이었다. 서기 945년 혜종 2년 왕규는 2대 임금 혜종(惠宗)에게 동생 요(窯)와 소(昭)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 무고한다. 혜종은 거짓말임을 알고 더욱 동생들을 사랑하였다고 전한다.

점복(占卜)에 밝은 최지몽(崔知夢)이 하늘의 별을 보고 나라에 역적이 일어나겠다 하니 임금은 왕규가 자기 동생들을 해치려는 징조로 짐작하고 소(昭)와 자기의 맏딸을 결혼시켜 집안을 튼튼히 해 주었다.


2.왕규의 임금 살해 시도

왕규는 자기 딸이 낳은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밤중에 혜종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심복을 몰래 들여보내 죽이려고 하였다. 혜종은 마침 잠이 깨어 한주먹으로 이를 때려죽인 후 사람을 불러 끌어내게 하였으나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하루는 혜종이 몸이 편치 않아 신덕전(神德殿)에 있는데, 최지몽이 아뢰기를 장차 변이 있을 터이니,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혜종은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옮겼다. 왕규는 밤에 심복들을 거느리고 와서 벽을 뚫고 들어갔으나 혜종이 잠자리를 옮긴 것을 알고 “너의 수작이 아니냐?”라고 물었으나, 최지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임금 혜종은 이를 불문에 붙였다.


3. 왕규의 난

그해 945년 혜종이 세상을 떠나고 동생 요(堯)가 왕위에 오르니, 고려 3대왕 정종(定宗)이다. 이에 왕규는 재빨리 정종의 명령이라 사칭하며 왕실에 충성한 박술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종은 전부터 왕규의 동태를 알고 있던 터이라 혜종의 병이 위독하자 서경(西京 : 평양)의 수비대장 왕식렴(王式廉 : 태조의 사촌동생, 정종의 당숙)과 미리부터 연락을 해두고 있었다.

왕규가 난을 일으키자 왕식렴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개성)에 들어와 정종을 호위하니 왕규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이에 왕식렴은 왕규를 붙잡아 갑곶(甲串)에 귀양 보냈다가 사람을 보내 죽여 버리고 그의 일당 3백여 명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진압해 즉위한 정종도 오래 가지 못하고 외척들에게 쫓겨 동생 소에게 왕위를 넘기고 아들 경춘원군의 목숨을 유지케 하였다. 그러나 광종은 즉위후 경춘원군을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는 이유로 전격 처형, 고려 초기의 왕권 불안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4. 학계 평가

왕규의 난(王規之亂)은 고려 초기 왕실의 외척 왕규(王規)가 자신의 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등극시키기 위해 일으킨 반란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왕권이 미약한 데에서 발생한 고려 혜종 때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으로 고려사에서 승자에 의해 왜곡된 기록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혜종을 보필하라는 태조의 유지를 받든 왕규는 군사적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혜종과 박술희의 보호를 받는 존재였으며, 그의 손자인 광주원군은 왕위 계승 서열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왕규는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이 사건을 왕위를 노린 정종과 광종의 음모로 보고 “왕규의 난”이 아닌 “왕식렴의 난”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5. 올드코난 개인적인 견해

왕규의 난이 역사의 조작이라는 견해를 같이한다. 임금의 자리는 힘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지지하는 세력과 합당한 명분이 없으면 반란이 성공해도 그 자리를 유지하기 어렵다.

왕규는 고려 태조가 왕 씨성을 줄 만큼 믿음을 얻었던 인물로 혜종과는 대립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외손자 광주원군을 왕으로 만들만한 정치적인 기반도 약한데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일 정도로 생각이 없는 인물이 아니었다.

고려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처럼 사관이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닌 왕의 명으로 기록되었던 시대니만큼 혜종 이후 왕이 되는 왕요(정종)과 왕소(광종)에 결탁한 왕식렴의 권력 장악 음모로 보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해 본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글에 공감하신다면 SNS (요즘,트위터,미투데이, 페이스북)로 널리 널리 알려 주세요. ★ 글의 오타, 하고픈 말, 그리고 동영상 등이 재생이 안되는 등 문제가 발견 되면 본문 하단에 댓글로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