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미국 행정학의 아버지 미국 제 28대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 (Thomas Woodrow Wilson) 평가

올드코난 2017. 1. 30. 20:32
반응형

토머스 우드로 윌슨 (Thomas Woodrow Wilson, 1856년 12월 28일 ~ 1924년 2월 3일)은 미국의 28대 대통령(1913~1921)으로 미국 행정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사상 최초로 유럽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며 1차 세계대전 승리와 이후 국제연맹 창설 등 주요한 업적이 있다. 정리해 본다.


1. 초기생애

1856년 12월 28일 버지니아주 스탠튼에서 스코틀랜드계 장로교 목사 조지프 윌슨과 자넷 우드로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윌슨이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바랬지만 윌슨은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에게서 정치를 배운뒤 정치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데이비슨 대학에 입학 1년후 프린스턴 대학으로 편입 1879년 졸업했다. 이후 버지니아 대학으로 가 1년간 법학을 공부했고 1886년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정치학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참고로 미국 역대 대통령 중 명예 박사학위가 아닌 진짜 박사학위를 딴 사람은 윌슨이 유일하다.


2. 미국 행정학의 아버지

정치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여러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고 1902년 만장일치로 46세의 나이로 모교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했고 1910년부터 1911년까지 미국 정치학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윌슨은 19세기 말 미국 정치의 엽관주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정치와 행정의 분리를 골자로 하는 펜들턴 법을 제정했고 행정을 정치 권력적 현상이 아닌 관리 기술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정치행정이원론을 주장했다. 1887년에 《행정의 연구》라는 저서를 통해 이러한 이론을 발표했고 이는 사실상 미국 내에서 행정학을 정치학으로부터 독립된 개념의 학문으로 보는 최초의 이론이기 때문에 우드로 윌슨을 '미국 행정학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한다.


3. 대통령

윌슨은 민주당에 영입되고 1910년 뉴저지 34대 주지사에 당선된다. 1912년 민주당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 윌슨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데 현직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와 전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립해 공화당이 분열해 40%밖에 안되는 득표율로 당대로는 가장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하며 당선되고 여기에 민주당이 1912년에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기에 이른다.

취임후 언더우드 관세법안 (Underwood Tariff)을 제정해 보호무역 정책으로 높았던 미국의 관세를 낮추고 대신 수정 헌법 16조에 근거하여 연방소득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고 1913년 12월 23일에 서명된 연방준비법 (Federal Reserve Act)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Federal Reserve Board)의 기초가 되었다. 1914년에는 연방무역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가 창설되면서 연방정부의 힘이 강화된다.

1914년 클레이턴 독점금지법이 통과되어 파업과 보이콧 행위를 합법화하고, 노사분규시 정부가 강제금지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 했다. 외교정책은 공화당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먼로독트린을 내세워 중립을 유지하지만,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과 치머만 전보 폭로등이 생기며 1917년 4월 6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해 승전국이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후 처리를 위해 모인 1919년 6월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윌슨은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했고 그중 "민족 자결의 원칙(민족자결주의)"은 전세계 식민지에게 희망을 주는 듯 했지만 말뿐이었다. 또 국제연맹 창설에 기여했지만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국제연맹에 가입하지도 못했고 일본 측이 인종차별 철폐 제안을 내놓자 윌슨은 미국으로 이민자가 몰릴 것을 우려해 반대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카톨릭 독재라며 동맹국들과의 협상 조건으로 황제의 퇴위와 민주 정부 수립을 내걸어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군주정이 붕괴되었는데 이 결과 나치가 집권했고 발칸반도의 혼란을 야기시켰다.


4. 사망

국제연맹 가입에 대해 의회가 지지해주지 않자 윌슨은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8천 마일에 달하는 무리한 유세를 하다 1919년 9월 25일 콜로라도 주 푸에블로 방문 중 뇌경색을 일으켜 10월 3일 반신불수가 돼버려 집무 불능 상태가 되었는데 윌슨의 부인 이디스 윌슨이 이를 숨기고 윌슨의 남은 임기동안 모든 국정을 처리했다.토마스 R. 마셜 부통령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마셜은 미국 역사상 세번째로 8년 임기를 다 채운 부통령이 된다.

1921년 임기가 끝나고 1924년 2월 3일 워싱턴 D.C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사망했다. 윌슨 사후 부인 이디스의 국정 처리가 밝혀졌고 이는 대통령 유고시 대통령직 승계 원칙에 대한 규정을 확실하게 한 미국 수정헌법 제25조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된다.


5. 평가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 대해서도 관대한 처벌을 주장했는데 독일의 경제 악화로 인한 사회혼란으로 인해 전쟁이 재발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악화가 사회혼란과 전쟁 재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예견한 것으로 이 점은 정치학자들에게 높이 평가받는다. 윌슨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는데, 그가 내세운 민족자결주의는 미국식 잣대로 본 세계평화론으로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승전국들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자신들이 가로채려고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민족자결주의는 윌슨이 주장하기 1년 전 러시아 혁명 정부가 발표한 민족자결권 선언에 맞대응하기 위해 나온 것에 불과해 그 내용도 러시아 혁명 정부의 것보다 빈약했다는 평 또한 받고 있다. 흑인을 탄압하지는 않았지만 흑인에 대해 벌어지는 범죄에 무관심해 백인우월주의자라는 의혹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전쟁을 반대했던 반전주의자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요즘 시대로 봤을때는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당시는 제국주의와 지독한 자본주의로 전세게적으로 민중들이 탄압을 받던 그런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다른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에 비해서는 덜 탄압을 했던 권력자였다. 단지 현실적이기 보다는 이성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윌슨에 대해선 동시대를 산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평가가 적절하다고 본다. 정치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했지만 1916년 재선거 무렵에는 윌슨을 지지했던 에디슨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윌슨이 크게 헤맸다고 말하고 내 생각도 그렇지만 전 윌슨은 헤매도 항상 앞으로 나아가면서 헤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윌슨은 구체적인 방법을 모를 수도 있지만, 최소한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알았던 사람이었다.


6. 윌슨의 일화

행정학 최초의 논문 '행정의 연구(The Study of Administration, 1887)를 발표했는데 정치와 행정을 분리시킬 것을 주문 오늘과 같은 행정부의 위상을 성립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 행정학계에서는 윌슨을 행정학의 시초로 본다. 이승만에게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 학위를 준 사람으로 프린스턴 학장 당시 윌슨은 이승만을 아껴서 가족 파티에도 초대해 한국을 이끌어나갈 청년이라고 소개했다고 전한다. 친구가 없었고 애처가였다고 한다. 최초로 유럽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었다. 의회에 보내는 첫번째 메시지를 직접 의회에 나가 읽어 존 애덤스 이래 사라졌던 관습을 다시 부활시켰다. 의외로 유머 감각과 위트가 있었다고 하는데 친구가 없는 이유를 모를 정도라고. 10만달러 지폐에 그의 얼굴이 새겨졌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