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 첫 폐출 왕비,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廢妃 愼氏)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생애

올드코난 2016. 1. 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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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비 중에서 왕이 폐위된 경우는 총 3번이다. 단종, 연산군, 광해군 등이다. 이중 단종은 공식적으로는 폐위된 것이 아니고 시호역시 있어서 폐군이라고 하지 않을뿐 실질적으로는 3명의 임금이 폐위를 당했다. 이들 중 조선 유일의 폭군은 연산군이었다. 다른 두 임금은 폭군까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폐위된 연산군의 부인이며 중전이었던 신씨 역시 폐비가 되고 마는데, 신씨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본다.

조선 첫 폐출 왕비,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廢妃 愼氏)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생애


1.개요

폐비 신씨(廢妃 愼氏, 1476년 12월 15일(음력 11월 29일)~1537년 5월 16일(음력 4월 8일)) 연산군(燕山君)의 왕비였다 폐위되어 시호가 없고 흔히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이라고도 불린다. 공식적으로는 조선에서 반정으로 인해 퇴위한 첫 번째 사례이지만,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이후 단종 복위사건으로 단종을 폐위한 것을 포함한다면 두 번째이다.


2.출생과 가계

거창부원군 장성공 신승선(居昌府院君 章成公 愼承善)과 중모현주 이씨(中牟縣主 李氏)의 딸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외할아버지 임영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아들로, 남편 연산군은 그녀의 칠촌 조카뻘이 되기도 한다. 또 이복 시동생인 중종에게는 형수이자 처고모가 된다. 아버지 신승선은 임영대군의 딸과 혼인을 하는데 그의 생모가 된다.


3.간택에서 폐비까지

세자빈으로 간택된 신씨는 1488년(성종 19년) 왕세자로 있던 연산군과 가례를 치르고 세자빈(世子嬪)이 되고 1494년 연산군 즉위와 함께 왕비(王妃)에 봉해졌다. 1495년에는 적통공주인 휘신공주를, 1498년 1월 10일(음력 12월 18일) 왕실의 적통장자인 원자를 낳았다.

1505년(연산군 11년)에는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의 존호를 받았지만 이듬해 1506년 연산군이 폐출당하면서 그녀도 군부인(郡夫人)의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연산군과의 사이에서는 4남 3녀를 낳았으나 두 아들과 공주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고, 두 아들은 연산군이 폐위된 후 사사되었다.


4.사후

중종32년 1537년 5월 16일(음력 4월 8일)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중종이 부의금을 내려 예를 다해 장례를 치르게 했는데, 군부인보다는 격이 높았다고 전한다. 신씨의 무덤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한 연산군묘(燕山君墓)이며, 남편 연산군과 쌍릉을 이루고 있다. 무덤의 비석명은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로 적혀있다.



5.평가

폐비 신씨에 대해서는 아마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연산군 하면 생각나는 여인이 장녹수인데, 중전이었던 신씨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신씨는 성품이 조용하고, 선한 인품이었다고 전한다. 오죽하면, 폐위되고 죽음을 당할 처지임에도 그녀를 죽이라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을까. 가장 두려워했을 중종 조차도 그녀를 후하게 대우해주었고, 신씨 집안의 노비들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그녀가 천수를 누를 수 있던 것은 본성이 착했기에 정적이 없었기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만일, 연산군이 폐위되지 않았다면 신씨는 모범적인 왕비로 기록될 수도 있던 여인이었다고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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