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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정계은퇴 선언, 떠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반성해야

올드코난 2014. 8. 1.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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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 재보궐선거에서 낙선한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상임고문이 어제 7월 31일 국회 정론관에서 오후 정계은퇴를 공식선언했다.

"이번 7·30 재보선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떠날 때 분명해야 한다. 한국 정치의 변화와 혁신이라는 차원에서 지금 물러나는 것이 순리. 시민의 한사람으로 돌아가 성실하게 생활하겠다.“고 은퇴의사를 밝혔다.

 

손학규 정계은퇴 선언, 떠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를 떠나게 만든 모든 1차적인 원인은 야권 내부에서 찾아 봐야 한다.

 

손학규 고문은 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꼽혀왔다.

 

참고: 손학규(孫鶴圭, 1947년 11월 22일 ~ ) 프로필

1947년 11월 22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서 교사였던 손병화, 양현자 부부 슬하의 10남매 중 막내로 출생.

아버지 손병화는 손학규가 태어날 무렵에 교장으로 승진했지만, 4살 되던 해인 1950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이후 손학규와 그의 형제들은 홀어머니를 모시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962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 고3 때인 1964년 대학생들과 함께 시청 앞 당시 국회의사당에서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했다. 이후 1965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해 한일협정 반대투쟁, 삼성그룹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 등에 참여했다가 연이어 무기 정학을 받고 강원도 함백탄광에 가서 광부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하다 나중에 학교로 돌아와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민주당 대표와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대학 졸업 후 1969년 육군에 입대 1972년에 병장 만기 제대 후 손학규는 소설가 황석영과 함께 구로공단에 작은 자취방을 얻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자와 빈민의 인권문제를 위해 활동하다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1970년대 중반 유신독재체제에서 손학규를 검거에 현상금 200만 원에 2계급 특진이 걸리기도 했다. 2년 동안 숨어 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부마항쟁 당시 김해 보안대로 연행되어 48시간을 무작정 두들겨 맞고 문초를 당하던 손학규는 유신독재체제가 붕괴하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1980년 서울의 봄이라 불리던 때 손학규는 세계교회협의회(WCC)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학위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5공 말기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을 맡아 부천서 성고문 사건 자료집인 우리의 딸 권양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각종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을 재개하다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서 박사학위 논문 《Authoritarianism and Opposition in South Korea》(London, Routledge)을 마무리한 손학규는 1988년에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88년에서 1990년까지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0년에서 1993년까지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1993년에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 제14대 총선 보궐 선거를 통하여 경기도 광명시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다.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의원으로서 재선한 후, 1996년 11월부터 1997년 8월까지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었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당선되어 3선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2002년에는 민선 3기 경기도지사가 되었다.

 

2007년 3월 19일 한나라당과 결별하고 범여권에 합류하는데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는 데 역할을 하였으나, 당시 대선후보 경선에서 정동영에게 패했다.

2010년 10월 3일 민주당 당대표로 선출이 되었고 2010년 12월 8일부터 12월 28일까지 전국을 돌며 민주대장정을 전개하기도 했다. 2012년 18대 대선 당내 경선에서는 문재인 후보에게 연이어 패해 대선구도에서는 멀어졌다.

그리고 손학규 고문에게 2014년 7·30 수원병 보궐선거는 정치적 재기를 위해 반드시 승리를 했어햐 했지만, 결국 낙선을 하고 정계은퇴로 이어졌다.

 

많이 아쉽다. 간혹 당을 옮겼다는 이유로 손학규 의원을 철새 의원으로 비유하지만, 분명 그 이유가 타당했다. 당시 한나당에서 손학규 의원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손학규 의원의 인품은 훌륭했다.

장관이나 의원등의 정치적 활동중 개인적인 비리나, 부당한 권력 남용 같은 일은 벌이지 않았다. 그리고 뒤끝도 없어서 그를 신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깨끗한 것이 그의 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번 7.30 재보궐 선거 역시 그의 강직하고 청렴함이 잘드러났다.

승리를 위해 네거티나 불법선거운동을 저지르지 않았다.

거짓 공약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손학규의 삶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영광스런 날들도 있었지만, 추한 짓을 하지 않았다. 존경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불의와 타협을 잘 하지 않은 성품이 오히려 그의 약점이었다.

 

그의 정계 은퇴가 민주당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손학규 만큼의 인물됨을 갖춘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과연 현재의 야권에서 제2의 손학규 같은 사람이 발 디딜 곳이 있기나 할까.

손학규의 은퇴는 구 민주당 기득권들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경고임을 새정치민주연합은 반성하기를 바란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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