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한국 전쟁 개요 (韓國戰爭, 6·25 전쟁, Korean War)

올드코난 2014. 12. 28.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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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韓國戰爭, 6·25 전쟁, Korean War)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벌어진 민족상쟁의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6·25 사변(六二五事變) 혹은 6·25 전쟁(六二五戰爭)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밖에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동란(六二五動亂)으로도 일컬으며, 약칭으로 육이오라고도 한다. 중장년층에서는 6·25사변으로 많이 불렀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민주주의(혹은 자본주의) 국가들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둘로 나뉘어 대립하다 김일성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겠다는 야욕과 맞물리면서 벌어진 전쟁으로 서로 같은 한민족간의 잔혹한 살육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아픔을 담은 사건이었다. 한국전쟁의 양상은 이념에 따른 냉전(冷戰)이 실전(實戰)으로 드러난 것으로, 전쟁양상은 국부전(局部戰)과 전면전(全面戰)이 복잡하게 전개 되었다.


1945.8.15 해방 이후 점령군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한반도를 지나는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을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8도선 이남 지역을 남한 (대한민국)으로 분할되어 있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을 둘로 나뉜다는 생각으로 분할 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 직전 당시 민주주의의 남한 이승만 정부와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산당의 김일성 (당시 내각총리)이 서로 대치하던 상황에서 3.8선 부근에서는 간헐적으로 국지전을 벌어지고 있던 중 북한의 김일성은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과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의 협의와 지지를 얻어 치밀한 계획 하에 남침을 준비한 북한의 김일성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지원한 전차를 앞세워 조선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하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에 UN은 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82안을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한국을 원조와 파병을 결정한다. 7월 7일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국제연합군이 조직되었는데 당시 상황은 북한군이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모두 점령하고 낙동강 유역까지 진군한 상태였다. 연합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최후의 결전을 전개하고 동시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키며 전세를 역전시킨다. 


이후 평양까지 점령하고 북한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김일성의 설득에 의해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다시 역전이 되며 다음해 1.4 후퇴를 하며 다시 38선을 기준으로 장기전으로 변해 버리게 된다. 1953년 7월 27일에 정전 협정이 체결될때까지 벌어진 전쟁으로 공식적으로는 종전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휴전 중이다.


3년이 넘게 계속된 전쟁으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고 무엇보다 전쟁이 남긴 가장 큰 피해는 남과 북을 서로 적대시 하면서 극단적인 이념과 사상으로 나뉘어 져 버려 여전히 이념논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전쟁의 피해는 국민들이 입었지만, 김일성과 이승만의 권력은 확고해져 장기집권과 독재로가 심화되는 부작용이 나타나 북한은 3대 세습으로 이어졌고, 남한은 이승만의 독재정치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까지 군사 독재정치가 이어져 많은 이들의 인권과 자유가 유린당하게 된다.


참고로 2013년 10월 24일 평화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청샤오허(成曉河) 중국인민대학 교수에 의해 김일성은 1965년 제2차 한국 전쟁을 계획했지만중국 공산당이 거부했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기밀해제 문서(No.106-01480-07)가 공개되었다. (글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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