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박정희 유신으로 이어진 1·21 사태 (김신조 사건) 설명

올드코난 2016. 1. 21.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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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사태(1.21.事態)는 김일성의 명령으로 1968년 1월 21일 박정희를 암살하기 위해 남파된 북한 공작원(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한 사건으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해 본다.

1968년 청와대 기습사건 1·21 사태 (김신조 사건) 박정희 유신으로 이어지다.

*주로 김신조의 진실에 의해 정리가 되었음을 알린다.


1.사건 개요

1968년 1월 13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의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받았다. 당시 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7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 남한 수도권에 잠입하는데는 성공하지만, 청운동의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하였다.

군과 경찰은 비상경계태세에 돌입 경기도 지역에 공비 소탕 작전을 벌인다. 당시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은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124부대 소속 31명 중 29명이 사살되고 김신조는 투항하고 다른 한 명은 도주하여 북으로 넘어갔다.



2.결과

이 사건 이후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박정희는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한다. 안보우선주의는 노동조합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고, 대한민국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되고 일반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영화 실미도로 만들어졌던 특수부대 684 부대(실미도 부대)를 비밀리에 조직 보복성 공격을 계획했지만 1971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데탕트가 조성되면서 불발에 그쳤다. 그리고 그해 8월 23일 감시병들을 살해하고 서울로 잠입한 실미도 사건을 일으킨다. (차후 정리)

또 그해 휴전선 근처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사살과 생포된 공비가 400명이 넘었다고 한다.)



3.피해

공비 29명 사살, 1명 귀순(김신조), 1명 도주, 군인경찰 전사자 22명, 민간인 8명 희생.


4.뒷 이야기

31명의 공비중 생존한 이는 2명으로 유일하게 투항했던 김신조(金新朝, 1942년 6월 2일 ~ )는 귀순 후 기독교도로 변한다. 서울침례회신학교(現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에서 침례교 신학을 전공하고 졸업한 후 현재 개신교 목사가 된다.

도주하고 북한으로 돌아간 유일한 인물은 조선인민군 대장 ‘박재경’으로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졌고, 2000년 9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남한을 방문한 김용순 당 중앙위 비서를 수행해 송이버섯을 전달한 인물이었다고 김신조는 밝혔다.

김일성은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전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과의 오찬 자리에서 1·21 청와대 기습 사건에 대해 자신은 아는 바가 없었다고 말했고 김신조는 이를 북한의 상투적 거짓말이라고 밝혔다.



5. 올드코난 생각

전국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박정희를 떨게 만든 1.21사태는 박정희 유신을 정당화 시킨 명분 중의 하나가 된다. 청와대를 급습한 이 일에 당시 박정희 정권에 분노했던 민심을 반공으로 돌릴 수가 있었고 몇 년후 박정희 유신시대로 이어지게 된다. 김신조는 무장공비였음에도 지금 목사로서 잘 살고 있다. 이유는 김신조가 체포되고 나서 한 말 “청와대를 까부수러 왔다”는 이 말 한마디에 박정희에 대한 동조와 지지를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그게 고마웠는지 무장공비였음에도 박정희 정부는 김신조를 우대해 주었던 것이다. 

현재 김신조는 우익 목사로서 보수들의 입장에서 북한 문제를 대하고 있다. 반면, 이 사건의 영향으로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주장은 급속도로 얼어붙게되고, 반공이데올로기가 우선이 되며, 예비군이 창설되고 국민들에게 전쟁 공포심을 조성해 박정희 장기집권에 도움을 주게 된다.


마무리하자면, 김신조 사건 (1.21사태)은 박정희에게 순간의 두려움은 주었지만, 권력을 공고히 해준 사건이며 한국인들에게는 민주주의의 열망을 무너뜨리게 된 계기를 준 최악의 사건으로 기억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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