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54년 전한의 제후국 오나라의 왕 유비가 주축이 되어 조(趙)·교서(膠西)·초(楚)·교동(膠東)·치천(菑川)·제남(濟南) 여섯 나라와 함께 전한 중앙 정부에 일으킨 오초칠국의 난(呉楚七国之乱)에 대해 설명해 본다.
전한 시대 오초칠국의 난(呉楚七国之乱) 과정과 영향 설명
1.개요
기원전 154년 경제 시대 제후왕의 죄를 빌미로 오나라에도 봉토를 삭감하려 하자,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조(趙)·교서(膠西)·초(楚)·교동(膠東)·치천(菑川)·제남(濟南) 등 여섯 나라와 함께황제 측근의 간신인 조조를 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킨다. 이 제후왕의 반란은 주아부(周亞夫)가 거느린 정부군에 의해 진압된다.
2.오나라 왕 유비와 경제의 사적감정
경제가 황태자 시절 오왕 비 (吳王 濞)의 세자 현(賢)과 바둑을 두다가 자신이 지게 되자 한 수 물러달라고 했다가 세자가 거절하자, 홧김에 바둑판을 집어던졌는데 그만 세자가 죽고 만다. 세자의 시신를 오나라로 보내 장사지내게 했는데, 오왕은 장안에서 장사지내지 않은 것에 노해 원망을 품게 되고 이후 입조를 하지 않았다.
3.제후들의 불만
경제시대에 이르면 제후들이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과거 주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대로 두면 한제국도 언젠가는 흔들릴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경제는 삭번을 하려한다.
경제는 태자 시절부터 총애한 조조를 어사대부로 삼았고, 조조는 제후왕의 죄를 물어 지군(제후국 관할의 군 중 서울을 관할하지 않는 지역)을 덜어내도록 청을 올리는 식으로 삭번을 하게 되는데 이에 제후들이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4. 반란의 시작
오나라에는 구리 광산이 있고 바다가 가까워 소금 또한 풍족했다. 경제는 구리가 나오는 예장군(豫鄣郡)을 바치라고 통보하고 40년간 오나라를 다스렸던 유비에게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명이었다. 유비는 제후들 중에서도 원로격이며 황실에서도 서열이 높은 인물로 제후들에게 영향력이 컸다. 그런 유비에게 오나라의 회계·예장 두 군을 덜어낸다는 조서가 내려오자, 오왕 유비는 반란을 결심한다. 오왕 유비가 제후들에게 반란을 권유하고 총 7개국 7왕이 가담하는데, 오왕 유비, 교서왕 유앙, 교동왕 유웅거, 치천왕 유현, 제남왕 유벽광, 초왕 유무, 조왕 유수 등이다.
오왕은 당시 자신의 나이인 62세 미만, 자신의 막내아들의 나이인 14세 이상 사람을 모두 징모하도록 명령을 내려 20여만 명을 동원하는데, 이는 당시 오나라의 거의 모든 장정들로 대부분 전쟁 경험이 없는 일반 백성들이기는 했지만 숫적으로는 많은 수였다. 여기에 조왕 유수는 흉노와 손을 잡고 군사를 함께하도록 밀약까지 맺는 등 반란 초기 반란군들은 어느 정도 위세가 있었고, 한나라 조정은 최대 위기로 여기게 된다.
5.진압과정
반란 소식에 경제는 대사면을 단행하고, 주아부를 태위로 삼고, 두영을 대장군으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두영은 출진하기 전에 난포와 옛 오나라 재상 원앙 등 재야의 인물들을 천거했다. 주아부는 오나라·초나라 방면을 맡았고, 역기는 조나라를 치러 출진했고, 난포는 조나라를 치러 출진했으며, 두영은 형양에 주둔하면서 조나라와 제나라 방면의 군사를 감독했다.
원앙은 경제를 만나 반란군이 조조를 제거할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니 조조를 죽여서 반란군에 사죄하면 누그러트릴 수 있다고 건의한다. 경제는 조조를 죽이고 원앙은 오왕을 찾아가 회유하지만 실패를 하고, 이때 오왕은 자신을 동제로 칭했다. 즉 경제는 서제가 되는 셈으로 반란의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반란군은 군사의 질도 떨어졌고, 유능한 지휘관이 없었던 반면 황군은 주아부와 경제의 친동생인 양왕 유무 등이 반란군을 막아냈고, 사기가 떨어진 반란군은 결국 얼마 안가 진압되고 만다.
6.사후 처리
반란 진압후 경제는 원래 오왕의 동생 집안인 덕경후의 아들과 초왕의 할아버지 초원왕의 아들 유례로 두 나라의 후사를 모두 세워주려 했지만 두태후가 반대했다. 황실의 원로로 난을 주도한 오나라를 괘씸하게 여겨 오나라는 이름을 강도나라로 고쳐 여남왕에게 주었다. 유례는 초왕이 됐고 제북왕은 반란군과 함께 모의했으나 실제로 반란에는 가담하지 않았기에 치천나라로 옮겼다. 여강왕은 반란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월나라와 교류했으므로, 장강 북쪽에 있는 형산나라로 옮겼다. 여남나라와 여강나라는 폐지하고 한 조정의 직할지로 삼았다. 교서나라에는 유단을 봉했다. 한편 조나라에서 중산나라를 새로 만들어 중산정왕을 봉했다. 반란 가담을 단호히 거부한 형산왕을 표창해 제북나라로 옮겼다. 주아부는 조후에, 두영은 위기후에 봉했고, 이 둘은 조회에서 열후 중 가장 존귀한 대접을 받았다.
1년 후인 기원전 153년, 교동나라에 교동강왕을 봉했고 2년 후인 기원전 152년, 광천왕을 조나라로 옮겨 봉했다.
7. 평가
이 사건 이전까지는 제후들이 같은 유씨라는 점과 왕실 어른으로 생각해 대등한 나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과거 주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제후국들이 강성해지면서 점차 한나라의 권위가 떨어질 수 있는 때에 오초칠국의 난이 발생하면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 제후들의 권한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이후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이후 중국은 청나라까지 절대 권력자는 황제라는 등식이 확고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싸움의 승리로 한나라는 확실히 안정기에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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