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40년 경제가 죽고 16세의 유철이 뒤를 이어 제위(帝位)를 이었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능력과 웅대한 포부를 품었던 무제는 즉위 초부터 과감한 개혁을 시도 하지만 초기에는 일부 좌절도 겪어야 했다. 바로 태황태후(太皇太后) 두(竇)씨 두태후 때문이었다.
두 태후는 본시 출신이 미미했다. 원래 유방의 아내 여(呂) 태후의 시녀로 있었는데 태후가 자신의 시녀들을 제후 왕들에게 하사하면서 변방인 ‘대(代)’로 떠나야 했다. 그녀는 조(趙)나라 출신이라 조왕(趙王)의 궁궐에 가고 싶어 담당 관리에게 사전에 부탁까지 해놓았지만 힘없는 설움을 겪으며 멀고 후미진 대 나라로 떠나야 했다. 다행히 대왕(代王)으로 있던 유항(훗날의 문제)의 총애를 받아 1남 1녀를 낳았고 문제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경제가 제위를 이었다.
두 태후는 문제(文帝)의 황후로 무제에게는 친할머니에 해당한다.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 경제가 세상을 떠나고 손자인 무제가 황위에 오르니 두 태후 입장에서는 어린 손자가 하는 일이 미덥지 않았다. 게다가 손자는 지나칠 정도로 자신만만하고 진취적이었으며 특히 유학을 좋아했다.
무제가 즉위할 당시 두 태후는 이미 약 40년간 황실의 어른으로 군림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두 씨 일족의 세력이 막강했다. 게다가 두 태후와 무제의 치국(治國) 사상은 큰 차이가 있었다.
두 태후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무위(無爲)의 다스림을 중시했다. 이는 한나라 개국 초기 일관적으로 지켜온 ‘백성들과 함께 휴식하는’ 기본적인 국책방향이기도 했다. 그 결과 백성들의 생활은 편해졌고 경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발전되어 ‘문경의 치’란 태평성대가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무제 시대에 이르자 전에 분봉되었던 제후왕들이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중앙 권력을 강화해 지방 세력을 견제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또 정책의 중점을 어디에 두는가에 대해 무제와 두 태후는 의견이 서로 달랐다.
두 태후는 황제(黃帝)나 노자의 학설을 좋아했고 아들인 경제에게도 노자를 읽도록 권했다. 평소 도가사상을 신봉했던 두 태후는 유학자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두 태후가 얼마나 유학을 싫어했는지 알려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일찍이 경제 때 원고생(轅固生)이란 유학자가 있었다. 어느 날 황태후의 어전에 불려가 노자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원고생은 대담하게도 “노자를 말씀하셨습니까? 그런 책은 노예들이나 읽는 책이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두 태후를 격노하게 했고 화가 잔뜩 난 태후는 그를 사나운 멧돼지 우리에 가뒀다. 멧돼지 밥이 되라는 의도였다. 원고생은 다행히 태후의 눈을 피해 미리 창을 넣어준 경제 덕분에 가까스로 멧돼지를 죽이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노자를 비방한 유학자가 멧돼지 우리에 감금된 이 사건은 경제 시대에 이미 유학을 숭상하는 세력과 도가 사상을 중시하는 세력 사이에 국정 운영을 둘러싼 다툼이 있었음을 반영한다.
이쯤되면 웬만한 인물이라면 태황태후가 돌아가실 때까지 얌전히 시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무제는 달랐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곧장 자신의 정책을 추진했다. 무제는 우선 전국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려 현명하고 어진 인재들을 조정에 추천하도록 당부했다. 널리 새로운 인재를 선발해 자신의 정치를 해보려는 시도였다. 또 자신이 신임하는 사람들을 중용해 조정의 대권을 맡겼다. 외삼촌인 전분(田蚡)을 태위(太尉)에 임명해 군권을 장악하게 했고, 그외 많은 유생들을 중용했다.
당시 무제가 얼마나 인재를 중시했는지 알려주는 고사성어가 있다. 바로 ‘안거포륜(安車蒲輪)’이란 말이다. 직역하면 바퀴를 부들로 싸서 편안하게 탈 수 있게 만든 수레를 말한다. 이는 초빙되는 인재가 도중에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한 배려였던 것이다.
한대 유학의 대가 동중서(董仲舒)도 이때 추천된 인물이다. 무제는 그를 불러 접견한 후 나라를 다스리는 대책에 대해 물었다. 동중서는 유가의 치국(治國)사상을 정리해 무제에게 상주했다. 당시 동중서가 주로 건의한 내용은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을 세워 백성을 교화할 선비를 양성하고 천하를 효율적으로 통일하고 다스리기 위해 제자백가 중 오직 유가(儒家)만을 남기고 다른 것은 배척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무제는 동중서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건의를 좇아 실행에 옮겼다.
해학(諧謔)으로 유명한 동방삭(東方朔)도 이 시기에 발탁된 인물이다. 그가 처음 무제에게 올린 상서는 한간(漢簡 한나라 시기의 죽간이나 목간 3천개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고 한다. 무제는 꼬박 두 달이 걸려서야 그 내용을 읽었다고 전해진다. 나중에 그는 중대부(中大夫)에 임명되었다. 그는 40여 년 간 조정에서 무제를 가까이 모시며 군신(君臣)간에 돈독한 우의(友誼)를 나눴다. 그는 한 무제가 새로운 계획을 꾸밀 때마다 지혜 주머니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당시 천거된 유명한 인물들은 장조(莊助), 주매신(朱買臣), 사마상여(司馬相如), 매고(枚皐), 종군(終軍), 오구수왕(吾丘壽王) 등이 있다. 이중 사마상여는 문장에 아주 뛰어난 재주가 있어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매고는 해학에 뛰어났다
하지만 당시 무제의 역량은 아직 두 태후와 비교할 수 없었다. 무제 즉위 초기 승상은 위관(衛綰)이었지만 그는 신병을 이유로 곧 사직했다. 그 뒤를 이어 승상이 된 인물은 두 태후의 먼 조카뻘인 두영(竇嬰)이었다. 또 군권을 장악한 태위에는 무제의 외삼촌(무제의 생모인 왕태후의 동생)인 전분(田蚡)이 임명되었다. 이들 둘은 비록 외척의 신분이었지만 모두 유학을 좋아했다. 그 외 어사대부(부총리 겸 감사원장)는 조관(趙綰), 낭중령(郎中令)은 왕장(王藏)이 맡았는데 이들 둘은 노나라의 저명한 유학자 신공(申公)의 제자였다.
이들은 정통 유가의 입장에서 당시 행해지던 여러 가지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개선을 요구했다. 유가 관료들은 황제에게 글을 올려 제후로서 봉지로 떠나지 않고 장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과 두 태후의 친족 중 난폭한 자들을 황실 족보에서 제명할 것을 요청했다. 이들이 겨냥한 것은 주로 두 태후를 중심으로 한 황실의 친인척들이었다. 이렇게 되자 자연스레 두 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와 젊은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의 갈등이 발생했다.
그러다 양자의 대립이 격화된 사건이 발생했다. 어사대부 조관이 예전부터 관례적으로 유지해왔던 두 태후에 대한 정무보고를 거부하며 황제의 친정을 건의한 것이다. 두 태후는 격노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유생들이 어린 황제를 끼고 자신을 압박하자 두 태후는 무제에게 압력을 가했다.
두 태후는 우선 무제를 압박해 막 실행에 옮겨진 일련의 개혁 조치들을 중단시키고, 조관 등 유가 관료들은 물론이고 승상과 태위마저 전부 파면시켰다. 두 태후의 눈 밖에 난 조관과 왕장은 결국 심한 압력을 받고 감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태후는 또 자신이 신임하는 인물들을 승상과 태위에 임명하고 자신의 명령을 따르도록 했다.
태후의 이런 조치는 무제의 개혁을 무위로 돌아가게 했고, 황제의 권위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무제는 이 일에 의기소침해지는 대신 힘을 축적하며 때를 기다렸다.
4년 후인 기원전 135년, 마침내 두태후가 서거했다. 무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두 씨 세력을 숙청하고 전분을 다시 승상에 임명한 후 자신의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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