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시

시) 만해 한용운(韓龍雲) – 쾌 락, 거문고 탈 때, 밤은 고요하고, 꽃이 먼저 알아

올드코난 2010. 7. 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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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韓龍雲)

 

쾌 락

 

님이여, 당신은 나를 당신 계신 때처럼 잘 있는 줄로 아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나를 아신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두고 멀리 가신 뒤로는, 나는 기쁨이라고는

달도 없는 가을 하늘에 외기러기의 발자취만치도 없습니다.

 

거울을 볼 때에 절로 오던 웃음도 나오지 않습니다.

꽃나무를 심고 물 주고 북돋우던 일도 아니합니다.

 

고요한 달 그림자가 소리없이 걸어와서 엷은 창에 소근거리는

소리도 듣기 싫습니다.

가물고 더운 여름 하늘에 소낙비가 지나간 뒤에,

산모퉁이의 작은 숲에서 나는 서을한 맛도 달지 않습니다.

동무도 없고 노리게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 가신 뒤에 이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쾌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따금 실컷 우는 것입니다.



거문고 탈 때

 

  달 아래에서 거문고를 타기는 근심을 잊을까 함이러니,

  첫 곡조가 끝나기 전에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밤은 바다가 되고 거문고줄은 무지개가 됩니다.

  거문고 소리가 높았다가 가늘고 느티나무 그늘로 사라질 때에,

  당신은 나를 힘없이 보면서 아득한 눈을 감았습니다.

  아아, 당신은 사라지는 거문고 소리를 따라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밤은 고요하고

 

  밤은 고요하고 밤은 물로 씻은 듯합니다.

  이불은 개인 채로 놓아두고 화롯불을  다듬거리고 앉았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화롯불은 꺼져서 찬 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오히려  식지 아니하였습니.

  닭의 소리가 채 나기도 전에                                

  그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하였는데 꿈조차  분명치 이나합니다그려 

 

 

꽃이 먼저 알아

 

옛 집을 떠나서 다른 시골의 봄을 만났습니다.

꿈은 이따금 봄바람을 따라서 아득한 옛터이 이릅니다.

지팡이는 푸르고 푸른 풀빛에 묻혀서, 그림자와 서로 다릅니다.

 

길가에서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고서,

행여 근심을 잊을까 하고 앉아 보았습니다.

꽃송이에는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아니한가 하였더니,

아아, 나의 눈물이 떨어진 줄이야 꽃이 먼저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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