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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만해 한용운(韓龍雲) – 당신의 편지, 예술가, 생명

올드코난 2010. 7. 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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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韓龍雲)

 


당신의 편지

 

  당신의 편지가 왔다기에, 꼬밭 매던 호미를 놓고  떼어 보았습니.

  그 편지는 글씨는 가늘고 글줄은 많으나, 사연은 간단합니다.

  만일 님이 쓰신 편지이면, 글은 짧을지라도 사연은 길 터인데.

 

  당신의 편지가   왔다기에 바느질   그릇을 치워놓고   떼어보았습니다.

  그 편지는 나에게 잘 있느냐고만 묻고,

  언제 오신다는 말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만일 님이 쓰신 편지이면 나의 일은 묻지 않더라도,

  언제 오신다는 말은 먼저 썼을 터인데.

 

  당신의 편지가  왔다기에 약을  달이다 말고  떼어 보았습니다.     

  그 편지는 당신의 주소는 다른 나라의 군함입니다.

  만일 님이 쓰신 편지이면 남의 군함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할 지 라도

  편지에는 군함에서 떠났다고 하였을 터인데.



예술가

 

나는 서투른 화가(畵家)여요.

잠 아니오는 잠자리에 누워서 손가락을 가슴에 대고

당신의 코와 입과 두 볼에 샘 파지는 것까지 그렸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작은 웃음이 떠도는 당신의 눈자위는

그리다가 백 번이나 지웠습니다.

 

나는 파겁(破怯) 못한 성악가여요.

이웃 사람도 돌아가고 버러지 소리도 그쳤는데

당신이 가르쳐 주시던 노래를 부르려다가

조는 고양이가 부끄러워서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는 바람이 문풍지를 스칠 때에

가만히 합창하였습니다.

 

나는 서정시인(敍情詩人)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 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와를 그대로 쓰고 싶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집과 침대와 꽃밭에 있는 작은 돌도 쓰겠습니다.


생명

 

닻과 키를 잃고 거친 바다에 표류된 작은 생명의 배는

아직 발견도 아니된 황금의 나라를 꿈꾸는

한 줄기 희망의 나침반이 되고 향로가 되고

순풍이 되어서, 물결의 한 끝은 하늘을 치고,

다른 물결의 한 끝은 땅을 치는 무서운 바다에 배질합니다.

 

님이여, 님에게 바치는 이 작은 생명의 파편은

최귀(最貴)한 보석이 되어서 조가조각이 적당히 이어져서

님의 가슴에 사랑의 휘장을 걸겠습니다.

님이여, 끝없는 사막의 한 가지의 깃들일 나무도 없는

작은 새인 나의 생명은 님의 가슴에

으스러지도록 껴안아 주셔요.

그리고 부서진 생명의 조각조각에 입맟춰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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