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39 (상권 끝)

올드코난 2010. 7. 1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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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임시정부의 조직에 관하여서는 후일 국사에 자세히 오를 것이니 약하거니와 나는

위원의 한 사람으로 뽑혔었다. 얼마 후에 안창호 동지가 미주로부터 와서

내무총장으로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고, 총장들이 아직 모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차장제를 채용하였다. 나는 안 내무총장에게 임시정부 문 파수를 보게 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도산은 처음에는 내 뜻을 의아하게 여기는 모양이었으나 내가 이 청원을

한 동기를 말하자 쾌락하였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에 순사 시험 과목을 어디서 보고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혼자 답안을 보았으나 합격이 못된 일이 있었다. 나는

실력이 없는 허명을 탐하기를 두려워할 뿐더러,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 번 우리 정부의 정청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

줍소서 하였단 말을 도산 동지에게 한 것이었다.

  안 내무청장은 내 청원을 국무회의에 제출한 결과 돌연 내게 경무국장의 사령을

주었다. 다른 총장들은 아직 취임하기 전이라 윤현지, 이춘숙, 신익회 등 새파란 젊은

차장들이 총장의 직무를 대행할 때라 나이 많은 선배로 문 파수를 보게 하면

드나들기에 거북하니 경무국장으로 하자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사될 자격도 못

되는 사람이 경무국장이 당하냐고 반대하였으나 도산은,

  "만일 백범이 사퇴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같이 오해될 염려가

있으니 그대로 행공하라."고 강권하기로 나는 부득이 취임하여 시무하였다.

  대한민국 2년에 아내가 인을 데리고 상해로 오고 4년에 어머니께서 또 오시니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 해에 신이 났다.

  나의 국모 복수사건이, 24년 만에 이제야 왜의 귀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왔다. 내가

본국을 떠난 뒤에야 형사들도 안심하고 김구가 김창수라는 것을 왜 경찰에 말한

것이었다. 아아, 눈물나는 민족의식이여! 왜의 정탐 노릇은 하여도 속에는 애국심과

동포애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 정신이 족히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독립 민족의

행복을 누리게 할 것을 아니 믿고 어이하랴.

  민국 15년에 내가 내무총장이 되었다.

  그 안에 아내는 신을 낳은 뒤에 낙상으로 인하여 폐렴이 되어서 몇 해를 고생하다가

상해 보륭의원의 진찰로 서양인이 시설한 격리 병원인 홍구폐병원에 입원하기로 되어

보륭의원에서 한 작별이 아주 영결이 되어 민국 6 1 1일에 세상을 떠나매 법계

숭산로의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내 본의는 독립운동 기간 중에는 혼상을 물론하고 성대한 의식을 쓰는 것을

불가하게 알아서 아내의 장례를 극히 검소하게 할 생각이었으나 여러 동지들이,

아내가 나를 위하여 평생에 무쌍한 고생을 한 것이 곧 나라 일이라 하여 돈을 거두어

성대하게 장례를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 주었다. 그 중에도 유세관, 인욱군은

병원교섭과 묘지 주선에 성력을 다하여 주었다.

  아내가 입원할 무렵에는 인이도 병이 중하였으나 아내 장례 후에는 완쾌하였고

신이는 겨우 걸음발을 탈 때요, 아직 젖을 떼지 아니하였으므로 먹기는 우유를

먹었으나 잘 때에는 어머니의 빈 젖을 물었다. 그러므로 신이가 말을 배우게 된

때에도 할머니란 말을 알고 어머니란 말을 몰랐다.

  민국 8년에 어머니는 신이를 데리고 환국하시고 이듬해 9년에는 인이도 보내시라는

어머니의 명으로 인이도 내 곁을 떠나서 본국으로 갔다. 나는 외로운 몸으로 상해에

남아 있었다.

  민국 9 11월에 나는 국무령으로 선거되었다. 국무령은 임시정부의 최고 수령이다.

나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을 보고, 아무리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국가라 하더라도

나같이 미미한 사람이 한 나라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에 관계된다 하여

고사하였으나 강권에 못 이기어 부득이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으로 내각을 조직한 후에 헌법 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독재적인 국무령제를 고쳐서 평등인 위원제로 하고 지금은 나

자신도 국무위원의 하나로 일하고 있다.

  내 육십 평생을 돌아보니 상리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고는 귀함이 없을 것이건마는, 나는 귀역궁 불귀역궁으로

평생을 궁하게 지내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는 날에는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거니와 지금의 나는 넓고 넓은 지구면에 한 치 땅, 한 칸 집도 가진 것이

없다. 나는 과거에는 궁을 면하고 영화를 얻으려고 몽상도 하고 버둥거려보기도

하였다. 옛날 한유는 '송궁문'을 지었으나 나는 차라리 '우궁문'을 짓고 싶다.

자식들에게 대하여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니 너희들이 나를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를 원치 아니한다. 너희들은 사회의 윤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 되어 사회를 아비로 여겨 효도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붓을 놓기 전에 두어 가지 더 적을 것이 있다.

  내가 동산평 농장에 있을 때 일이다. 기미년 2 26일이 어머니의 환갑이므로 약간

음식을 차려서 가까운 친구나 모아 간략하나마 어머니의 수연을 삼으리라 하고 내외가

상의하여 진행하던 차에 어머니께서 눈치를 채시고, 지금 이 어려운 때에 환갑 잔치가

당치 아니하니 후년에 더 넉넉하게 살게 된 때로 미루라 하시므로 중지하였더니 그 후

며칠이 못하여 나는 본국을 떠났다. 어머니께서 상해에 오신 뒤에도 마음은 먹고

있었으나 독립운동을 하노라고 날마다 수십 수백의 동포가 혹은 목숨을, 혹은 집을

잃는 참보를 듣고 앉아서 설사 힘이 있기로서니 어떻게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을 차릴

경황이 있으랴. 하물며 내 생일 같은 것은 입밖에 낸 일도 없었다.

  민국 8년이었다. 하루는 나석주가 조반 전에 고기와 반찬거리를 들고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를 보고 오늘이 내 생일이라, 옷을 전당 잡혀서 생일 차릴 것을 사왔노라

하여서, 처음으로 영광스럽게 내 생일을 차려 먹은 일이 있었다. 나석주는 나라를

위하여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제 손으로 저를 쏘아 충혼이 되었다. 나는 그가

차려 준 생일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또 어머니의 화연을 못드린 것이 황송하여

평생에 다시는 내 생일을 기념치 않기로 하고 이 글에도 내 생일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

  인천 소식을 듣건대 박영문은 별세하고 안호연은 생존한다 하기로선 편에 회중시계

한 개를 사 보내고 내가 김창수란 말을 하여 달라 하였으나 회보는 없었고 성태영은

길림에 와 산다 하기로 통신하였으며, 유인무는 북간도에서 누구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들 한경은 아직도 거기 살고 있다고 한다. 나와 서대문 감옥에서 이태나 한 방에

있으며 내게 글을 배우고 또 내게 끔찍이 하여 주던 이종근은 아라사 여자를 얻어

가지고 상해에 와서 종종 만났다. 이종근은 의병장 이운룡의 종제로, 헌병 보조원을

다니다가 이운룡이 죽이려 하매 회개하고 그를 따라 의병으로 다니다가 잡혀 왔었다.

김형진 유족의 소식은 아직도 모르고 강화 김주경 유족의 소식도 탐문하는 중이다.

지난 일의 연월일은 어머니께 편지로 여짜와서 기입한 것이다.

  내 일생에 제일 행복은 몸이 건강한 것이다. 감옥 생활 5년에 하루도 병으로 쉰

날은 없었고 인천 감옥에서 학질로 반 일을 쉰 일이 있을 뿐이다. 병원이라고는 혹을

떼느라고 제중원에 1개월, 상해에서는 서반아감기로 20일 동안 입원하였을 뿐이다.

  기미년에 고국을 떠난 지 우금 10여 년에 중요한 일, 진기한 일도 많으나 독립 완성

전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매 아니 적기로 한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일년 넘은 대한민국 11 5 3일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붓을 놓는다.

  (상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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