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37

올드코난 2010. 7. 10.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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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서대문에 있을 적에 어떤 강도가 중형을 지고 징역을 하는 중에 그의

공범으로서 잡히지 않고 있다가 횡령죄의 경형으로 들어온 것을 보고 밀고하여 중형을

지우고 저는 감형을 받아서 다른 죄수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을 보았다. 이것을

생각하니 문가를 덧들여 놓았다가는 큰일이다. 이자가 내가 17년 전의 김창수라는

것을 밀고하거나 떠벌리는 날이면 모처럼 일년 남짓하면 세상에 나가리라던 희망은

허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문가에게 친절 또 친절하게 대접하였다. 사식도 틈을

타서 문가를 주어 먹게 하고 감식(감옥에서 주는 밥)이라도 문가가 곁에 있기만 하면

나는 굶으면서도 그를 먹였다. 이러다가 문가가 만기가 되어 출옥할 때에 나의

시원함이란 내가 출옥하는 것 못지 아니하였다.

  나는 아침이면 다른 죄수 하나와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어 짝을 지어 축항

공사장으로 나갔다. 흙지게를 등에 지고 십여 길이나 되는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것이다. 서대문 감옥에서 하던 생활은 여기 비기면 실로 호강이었다. 반 달 못하여

어깨는 붓고 등은 헐고 발은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면할 도리는

없었다. 나는 여러 번 무거운 짐을 진 채로 높은 사닥다리에서 떨어져 죽을 생각도

하였으나 그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 나와 마주 맨 사람은 대개 인천에서 구두켤레나

담뱃갑이나 훔치고 두서너 달 징역을 지는 판이라 그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도 편하려 하는 잔꾀를 버리고

 

  '(열즉열살도리 한즉한살도리)

  더울 때는 더위로 도리를 죽이고 추울 때는 추위로 도리를 죽여라'

 

  의 선가의 병법으로 일하기에 아주 몸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였더니 몸이

아프기는 마찬가지라도 마음은 편안하였다.

  이렇게 한 지 두어 달에 소위 상표라는 것을 주었다. 나는 도인권과 같이 이를

거절할 용기는 없고 도리어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날마다 축항공사장에 가는 길에 나는 17년 전 부모님께 친절하던 박영문의

물상객주집 앞을 지났다. 옥문을 나서서 오른편 첫째집이었다. 그는 후덕한 사람이요,

내게는 깊은 동정을 준 이였다. 아버지와는 동갑이라 해서 매우 친밀히 지냈다고 했다.

우리들이 옥문으로 들고 날 때에 박노인은 자기 집 문전에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목전에 보면서도 가서 내가 아무개요 하고 절할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

  박씨 집 맞은편 집이 안호연의 물상객주였다. 안씨 역시 내게나 부모님께나

극진하게 하던 이었다. 그도 전대로 살고 있었다. 나는 옥문을 출입할 때마다

마음으로만 늘 두 분께 절하였다.

  7월 어느 심히 더운 날 돌연히 수인 전부를 교회당으로 부르기로,

  나도 가서 앉았다. 이윽고 분감장인 왜놈이 좌중을 향하여,

  "55!"

하고 부른다. 나는 대답하였다. 곧 일어나 나오라 하기로 단위로 올라갔다. 가출옥으로

내보낸다는 뜻을 선언한다. 좌중 수인들을 향하여 점두레를 하고 곧 간수의 인도로

사무실로 가니 옷 한 벌을 내어 준다. 이로써 붉은 전중이가 변하여 흰 옷 입은

사람이 되었다. 옥에 맡아 두었던 내 돈이며 물건이며 내 품값이며 조수히 내어준다.

  옥문을 나서서 첫번째 생각은 박영문, 안호연 두 분을 찾는 일이었으나 지금 내가

김창수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이롭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안 떨어지는 발길을

억지로 떼어서 그 집 앞을 지나 옥중에서 사귄 어떤 중국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그날

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에 전화국으로 가서 안악 우편국으로 전화를 걸고 내 아내를 불러달라고

하였더니 전화를 맡아 보는 사람이 마침 내게 배운 사람이라 내 이름을 듣고는 반기며

곧 집으로 기별한다고 약속하였다.

  나는 당일로 서울로 올라가 경의선 기차를 타고 신막에서 일숙하고 이튿날 사리원에

내려 배넘이 나루를 건너 나무리벌을 지나니 전에 없던 신작로에 수십 명 사람이

쏟아져 나오고 그 선두에 선 것은 어머니이셨다. 어머니는 내 걸음걸이를 보시며 마주

오셔서 나를 붙들고 낙루하시면서,

  "너는 살아왔지마는 너를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화경이 네 딸은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게 말할 것 없다고 네 친구들이 그러길래 기별도 아니하였다. 그나

그뿐인가. 일곱 살밖에 안 된 그 어린 것이 죽을 때에 저 죽거든 아예 옥중에 계신

아버지한테 기별 말라고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느냐고 그랬단다."

하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후에 곧 화경의 무덤을 찾아 보아 주었다. 화경의 무덤은

안악읍 동쪽 산기슭 공동묘지에 있었다.

  어머니 뒤로 김용제 등 여러 사람이 반갑게, 또 감개 깊게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안신학교로 갔다. 내 아내가 안신학교에 교원으로 있으면서 교실 한 칸을 얻어

가지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다른 부인들 틈에 섞여서 잠깐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는 내 친구들과 함께 내가 저녁을 먹게 하려고

음식을 차리러 간 것이었다. 퍽 수척한 것이 눈에 띄었다.

  며칠 후에 읍내 이인배의 집에서 나를 위하여 위로연을 배설하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시켰다. 잔치 중도에 나는 어머니께 불려 가서,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

하시는 걱정을 들었다. 나를 연회석에서 불러 낸 것은 아내가 어머니께 고발한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내 아내와는 전에는 충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내가 옥에 간 후로 서울로,

시골로 고생하고 다니시는 동안에 고부가 일심동체가 되어서 한 번도 뜻 아니 맞은

일이 없었다고 아내가 말하였다. 아내는 서울서 책 매는 공장에도 다녔고 어떤 서양

부인 선교사가 학비를 줄 테니 공부를 하라는 것도 어머니와 화경이가 고생이 될까

보아서 아니했노라고, 내외간에 말다툼이 있을 때면 번번이 그 말을 내세웠다. 우리

내외간에 다툼이 생기면 어머니는 반드시 아내의 편이 되셔서 나를 책망하셨다.

경험에 의하면 고부간에 무슨 귓속말이 있으면 반드시 내게 불리하였다. 내가 아내의

말을 반대하거나 조금이라도 아내에게 불쾌한 빛을 보이면 으례 어머니의 호령이

내렸다.

  "네가 옥에 있는 동안에 그렇게 절을 지키고 고생한 아내를 박대해서는 안 된다.

동지들의 아내들 중에 별별 일이 다 있었지마는 네 처만은 참 절행이 갸륵하다.

그래서는 못 쓴다."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안 일에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해본 일이 없었고 내외

싸움에 한 번도 이겨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옥에서 나와서 또 한 가지 기뻤던 것은

준영 삼촌이 내 가족에 대하여 극진히 하신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아내와 화경이를

데리고 내 옥바라지하러 서울로 가시는 길에 해주 본향에 들르셨을 적에 준영 삼촌은

어머니께, 젊은 며느리를 데리고 어떻게 사고무친한 타향에 가느냐고, 당신이 집을

하나 마련하고 형수님과 조카 며느리 고생을 아니 시킬 테니 서울 갈 생각은 말고

본향에 계시라고 굳이 만류하시는 것을 어머니는 며느리는 옥과 같은 사람이라 어디를

가도 걱정이 없다 하녀 뿌리치고 서울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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