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32

올드코난 2010. 7. 10. 15:28
반응형

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차입밥! 얼마나 반가운 것인가. 그러나 왜놈들이 원하는 자백을 아니하면 차입은

허하지 아니한다. 참말이나 거짓말이나 저희들의 비위에 맞는 소리로 답변을 해야만

차입을 허하는 것이다. 나는 종내 차입을 못 받았다. 조석 때면 내 아내가 내게

들리라고 큰 소리로,

  "김구 밥 가져 왔어요."

하고 소리치는 것이 들리나 그때마다 왜놈이,

  "깅 가메 나쁜 말이 했소데. 사시이래 일이 오브소다."

하고 물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깅가메'라는 것은 왜놈들이 부르는 내 별명이다.

  그러나 배고픈 것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대였다.

  내가 아내를 팔아서라도 맛있는 것을 실컷 먹고 싶다고 생각할 때에 경무총감

명석의 방으로 나를 불러들여 극진히 우대하였다. 더할 수 없는 하지하천의 대우에

진절머리가 났던 나에게 이 우대가 기쁘지 않음이 아니었다.

  명석이 놈이 내게 한 말의 요령은 이러하였다. 내가 신부민으로 일본에 대한 충성만

표시하면 즉각으로 자기가 총독에게 보고하여 옥고를 면하게 할 터이요, 또 일본이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서 순전히 일본인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덕망이 높은 조선

인사를 얻어서 정치를 하게 하려 하니 그대와 같이 충후한 장자로서 대세의 추이를

모를 바 아닌즉 순응함이 어떠냐. 그런즉 안명근 사건에 대한 것은 사실대로 자백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명석에게 대하여,

  "당신이 나의 충후함을 인정하거든 내가 자초로부터 공술한 것도 믿으시오."

하였다. 그놈은 가장 점잖은 체모를 가지나 기색은 좋지 못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오늘 내가 불려 나와서 처음에 당장 때려 죽인다고 하다가

이놈의 방으로 끌려 들어온 것이었다.

  이놈은 국우라는 경시다. 그는 제가 대만에 있을 때에 어떤 대만인 피의자 하나를

담임하여 심문하였는데 그 사람이 나와 같이 고집하다가 검사국에 가서야 일체를

자백하였노라 하는 편지를 국우에게 보내었다 하며, 나도 검사국에 넘어가거든 잘

자백을 할 터이니 그러면 검사의 동정을 얻으리라 하고 전화로 국수장국에 고기를

많이 넣어서 가져오라고 명하여 그것을 내 앞에 놓고 먹기를 청한다. 나는 나를

무죄로 한다면 이 음식을 먹으려니와 나를 유죄로 한다면 나는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하고 숟가락을 들지 아니하였다.

  그런즉 그놈이,

  "김구씨는 한문병자야. 김구는 내게 동정을 아니하지마는 나는 자연히 김구씨께

동정이 간단 말요. 그래서 변변치 못하나마 드리는 대접이니 식기 전에 어서 자시오."

한다. 그래도 나는 일향 사양하였더니 국우는 웃으면서 한자로,

 

  '(군의치독부)

  그대는 음식에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는가.'

 

  하는 다섯 자를 써 보이며, 이제는 심문도 종결되었고 오늘부터는 사식 차입도

허한다고 하였다. 나는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는 것은 아니라 하고 그 장국을 받아

먹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부터 사식이 들어왔다.

  나와 같은 방에 이종록이라 하는 청년이 있는데 그를 따라온 친척이 없어서 사식을

들여 줄 이가 없었다. 내가 밥을 그와 한 방에서만 먹으면 그를 나눠줄 수도

있겠지마는 사식은 딴 방에 불러내어서 먹이기 때문에 그리할 수가 없어서 나는 밥과

반찬을 한 입 잔뜩 물고 방에 들어와서 제비가 새끼 먹이듯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

먹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 뿐이요, 이튿날 나는 종로 구치감으로 넘어갔다. 방은

독방이라 심심하나 모든 것이 총감부보다는 편하고 거기서 주는 감식이라는 밥도

총감부의 것보다는 훨씬 많았다.

  내 사건은 사실대로만 처단한다 하면 보안법 위반으로 극형이라 하여 징역 일년밖에

안될 것이지마는 나를 억지로 안명근의 강도사건에 끌어다 붙이려 하였다. 내가

억지로라 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내가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서간도에

이민을 하고 무관학교를 세울 목적으로 이동녕을 파견할 회의를 한 날짜가 바로

안악에서 안명근, 김홍량 등이 부호를 협박할 의논을 하였다 하는 그 날짜이므로 나는

도저히 안악에서 한 회의에 참예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하건마는 안악

양산학교 교직의 아들 이원형이라 하는 14세 되는 어린아이를 협박하여 내가 그

자리에 참예하는 것을 보았노라고 거짓 증언을 시켜서 나를 안명근의 강도 사건에

옭아 넣었다. 애매하기로 말하면 김홍량이나 도인권이나 김용제나 다 애매하지마는

그래도 이들은 그날 안악에는 있었으니 회의에 참예했다고 억지로 우겨댈 수도

있겠으나 5백 리 밖에서 다른 회의에 참예하였다고 저희 기록에 써놓은 내가, 같은

날에 안악의 회의에도 참예했다는 것은 요술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나는 내게 대한 유일한 증인인 이원형 소년이 내가 심문 받는 옆방에서 심문 받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너는 안명근과 김구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지?"

하는 심문에 대하여 이 소년은,

  "나는 안명근이라는 사람은 얼굴도 모르고, 김구는 그 자리에 없었소."

하고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옆에서 어떤 조선 순사가,

  "이 미련한 놈아. 안명근이도 김구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만 하면 너의 아버지를

따라 집에 가게 해줄 터이니 시키는 대로 대답을 해."

하는 말에 원형은,

  "그러면 그렇게 할 터이니 때리지 마셔요."

하였다.

  검사정에서도 이원형을 증인으로 불러 들였으나, 이 소년이,

  "."

하는 대답이 있자마자 다른 말이 더 나오는 것을 꺼리는 듯 곧 문 밖으로 몰아내었다.

나는 5백 리를 새에 둔 회의에 한 날에 참예하는 김구를 만드노라고 매우

수고롭겠다고 검사에게 말하였더니 검사는 그 말에 대답도 아니하고,

  "종결!"

하고 심문이 끝난 것을 선언하였다.

  내가 경무총감부에 갇혀 있을 그때 의병장 강기동도 잡혀 와 있었다. 그는 애초에

의병으로 다니다가 귀순하여서 헌병 보조원이 되었다. 한 번은 사형을 당할 의병

10여명이 갇힌 감방을 수직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감방문을 열어 의병들을 다

내어놓고 무기고를 깨뜨리고 무기를 꺼내어 일제히 무장을 하고 그도 같이 달아나서

경기, 충청, 강원도 등지로 왜병과 싸우고 돌아다니다가 안기동이라고 변명하고 원산에

들어가 무슨 계획을 하다가 붙들려 온 것이었다. 그는 육군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김좌진도 애국운동으로 강도로 몰려 징역을 받고 나와 같은 감방에서

고생을 하였다.

  하루는 안악 군수 이모라는 자가 감옥으로 나를 찾아와서 양산학교 집과 기구를

공립보통학교에 내어놓는다는 도장을 찍으라고 하므로, 나는 집은 나랏집이니까

내어놓지마는 기구는 사삿 것이니 사립학교인 양산학교에 기부한다고 하였으나 그것도

공립으로 가져가고 말았다. 양산학교는 우리들 불온분자들의 학교라 하여 강제로

폐지해 버린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들은 목자를 잃은 양과 같이 다

흩어져 버렸을 것이다. 특별히 손두환과 우기범 두 학생이 생각났다. 재주로나

뜻으로나 특출하였고 어리면서도 망국 한을 느낄 줄 아는 이들이었다.


 (다음페이지 계속)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