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9

올드코난 2010. 7. 1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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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장차 서울 북달은재에서 이완용을 단도로 찌른 의사

이재명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한 허열에 뜬 청년으로만 보았다. 노백린도

나와 같이 생각한 모양이어서 그의 손을 잡고 큰 일을 하려는 사람이 큰 일을 할

무기를 가지고 아내를 위협하고 동네를 소란케 하는 것은 아직 수양이 부족한

것이라고 간곡히 말하고 그 단총을 자기에서 맡겨 두고 마음을 더 수양하고 동지도 더

얻어 가지고 일을 단행하라고 권하였더니, 이재명은 총과 칼을 노백린에게 주기는

주면서도 선선하게 주는 빛은 없었다.

  노백린이 사리원역에서 차를 타고 막 떠나려 할 때에 문득 이재명이 그곳에

나타나서 노에게 그 맡긴 물건을 도로 달라고 하였으나 노는 "서울 와서 찾으시오."

하고 떠나버렸다.

  그 후 일삭이 못 되어 이 의사는 동지 몇 사람과 서울에 들어와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천주교당에 다녀오는 이완용을 찌른 것이었다. 완용이 탔던 인력거꾼은

즉사하고 완용의 목숨은 살아나서 나라를 파는 마지막 도장을 찍을 날을 주었으니

이것은 노백린이나 내가 공연한 간섭으로 그의 단총을 빼앗은 때문이었다.

  나라의 명맥이 경각에 달렸으되 국민 중에는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가 많았다.

이에 일변 깨달은 지사들이 한데 뭉치고 또 일변 못 깨달은 동포를 계발하여서 다

기울어진 국운을 만회하려는 큰 비밀운동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신민회였다. 안창호는

미국으로부터 돌아와서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청년 교육을 표면의 사업으로

하면서 이면으로는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전덕기, 이동녕, 주진수, 이갑, 이종호,

최광옥, 김홍량 등과 기타 몇 사람을 중심으로 하고 4백여명 정수분자로 신민회를

조직하여 훈련. 지도하다가 안창호는 용산 헌병대에 잡혀 갇혔다. 합병이 된 뒤에는

소위 주의인물을 일망타진할 것을 미리 알았음인지, 안창호는 장연군 송천에서 비밀히

위해위로 가고, 이종호, 이갑, 유동열 등 동지는 뒤를 이어서 압록강을 건넜다.

  서울에서 양기탁의 이름으로 비밀회의를 할 터이니 출석하라는 통지가 왔기로 나도

출석하라는 통지가 왔기로 나도 출석하였다. 그때 양기탁의 집에 모인 사람은 주인

양기탁과 이동녕, 안태국, 주진수, 이승훈, 김도희와 그리고 나 김구였다. 이 회의의

결과는 이러하였다.

  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 도독부를 두고 각 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서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 계획을 세우고 또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 전쟁에 쓸 장교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 도 대표를 선정하니

황해도에 김구,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이었다. 이 대표들은 급히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판비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경술년 11 1일 아침, 서울을 떠났다. 양기탁의 친 아우 인탁이 재령 재판소

서기로 부임하는 길로 그 부인과 같이 동차하였으나 기탁은 내게 인탁에게도 통정은

말라고 일렀다. 부자와 형제간에도 필요 없이는 비밀을 누설하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사리원에서 인탁과 작별하고 안악으로 돌아와 김홍량에게 이번 비밀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말하였더니 김홍량은 그대로 실행하기 위하여 자기의 가산을 팔기로 내놓았다.

그리고 신천 유문형 등 이웃 고을 동지들께도 비밀히 이 뜻을 통하였다. 장연

이명서는 우선 그 어머니와 아우 명선을 서간도로 보내어 추후하여 들어오는 동지들을

위하여 준비하기로 하고 일행이 안악에 도착하였기로 내가 인도하여 출발시켰다.

이렇게 우리 일은 착착 진행중에 있었다.

  어느 날 밤중에 안명근이 양산학교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가 서울 가

있는 동안에도 누차 찾아왔었던 것이었다. 그가 나를 찾은 목적은,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돈을 내마 하고 자기에게 허락하고도 안 내는 부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우선 안악 부자들을 육혈포로 위협하여 본을 보일 터이니, 나에게 지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과는 상관이 없고 안명근이 독자로

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돈을 가지고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의 계획에

의하면 동지를 많이 모아서 황해도의 전신과 전화를 끊어 각지에 있는 왜적이 서로

연락하는 길을 막아 놓고 지방지방이 일어나서 제 지방에 있는 왜적을 죽이라는 영을

내리면 반드시 성사가 될 것이니 설사 타지방에서 왜병이 대부대로 온다 하더라도

닷새는 걸릴 것인즉 그동안은 우리의 자유로운 세상이고 실컷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명근의 손을 잡고 이 계획은 버리라고 만류하였다. 여순에서 그 종형 중근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과 달리 격분도 할 일이지마는, 국가의 독립은 그런

일시적 설원으로 되는 것이 아닌즉 널리 동지를 모으고 동포를 가르쳐서 실력을 기른

뒤에 크게 싸울 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뜻을 말하고, 서간도에 이민을 할 것과 의기

있는 청년을 많이 그리로 인도하여 인재를 양성함이 급무라는 뜻을 설명하였다.

말을 듣고 그도 그렇다고 수긍은 하나 자기의 생각과 같지 아니한 것이 불만한

모양으로 서로 작별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아니하여서 안명근이 사리원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것이 신문으로 전하였다.

  해가 바뀌어 신해년 정월 초닷샛날 새벽, 내가 아직 기침도 하기 전에 왜 헌병

하나가 내 숙소인 양산학교 사무실에 와서 헌병 소장이 잠깐 만나자 한다 하고 나를

헌병 분견소로 데리고 갔다. 가보니 벌써 김홍량, 도인권, 이상진, 양성진, 박도병,

한필호, 장명선 등 양산학교 직원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 모양으로 불려 왔다.

경무총감부의 명령이라 하고 곧 우리를 끌어내어 사리원으로 가더니 거기서 서울 가는

차를 태웠다. 같은 차로 잡혀가는 사람들 중에는 송화 반정 신석충 진사도 있었으나

그는 재령강 철교를 건널 적에 차창으로 몸을 던져서 자살하고 말았다.

 신 진사는 해서에 유명한 학자요 또 자선가였고 그 아우 석제도 진사였다. 한 번

내가 석제 진사를 찾아갔을 때에 그 아들 낙영과 손자 상호가 동구까지 마중 나오기로

내가 모자를 벗어서 인사하였더니 그들은 황망히 갓을 벗어서 답례한 일이 있었다.

  또 차중에서 이승훈을 만났다. 그는 잡혀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가 포박되어

가는 것을 보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차가

용산역에 닿았을 때에(그때에는 경의선도 용산을 지나서 서울로 들어왔었다) 형사

하나가 뛰어올라 와서 이승훈을 보고,

  "당신 이승훈 씨 아니오?"

하고 물었다. 그렇다 한즉 그 형사놈이,

  "경무총감부에서 영감을 부르니 좀 가십시다."

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와 같이 결박을 지어서 끌고 갔다. 후에 알고 보니

황해도를 중심으로 다수의 애국자가 잡힌 것이었다. 이것은 왜가 한국을 강제로

빼앗은 뒤에 그것을 아주 제 것을 만들어 볼 양으로 우리 나라의 애국자인 지식계급과

부호를 모조리 없애 버리려는 계획의 제일회였다. 그러기 위하여는 감옥과 이왕 있는

유치장만으로는 부족하여 창고 같은 건물을 벌의 집 모양으로 간을 막아서 임시

유치장을 많이 준비하여 놓고 우리들을 잡아 올린 것이었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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