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6

올드코난 2010. 7. 1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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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정창극은 실로 진실한 아전이었다. 당시 상하를 물론하고 관리라는 관리는 모두

나라와 백성의 것을 도적하는 탐관으로 되었건마는 정창극만은 일 푼도 받을 것

이외의 것을 받음이 없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군수도 감히 탐학을 못하였다.

  얼마 후에 농상공부로부터 나를 종상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사령서가 왔다. 이것은 큰

벼슬이어서 관속들이며 천민들은 내가 지나가는 앞에서는 담뱃대를 감추고 허리를

굽히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태 동안이나 살던 사직동 집을 떠나지 아니하면 안되게 되었다.

그것은 오 진사와 내 종형이 죽은 때문이었다. 오 진사는 고기잡이 배를 부리기

이태만에 가산을 패하고 세상을 떠나니, 나는 사직동 가대를 그의 유족에게 돌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또 종형은 본래는 낫 놓고 기억자도 몰랐었으나, 나를 따라 장연에

와서 예수를 믿은 뒤로는 국문에 능통하여 종교서적을 보고 강단에서 설교까지 하게

되었었는데, 불행히 예배보는 중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서 나는

종형수에게 개가하기를 허하여 그 친정으로 돌려 보내고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읍내로

떠났다. 내가 사직동에 있는 동안에 유인무와 주윤호가 다녀갔다. 그들은 예전 복간도

관리사 서상무와 합력하여 북간도에 한 근거지를 건설할 차로 국내에서 동지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 지기들이라 하여 밤을 삶고 닭을 잡아서

정성으로 그들을 대접하셨다. 우리는 밤과 닭고기를 먹으면서 연일 밤이 늦도록

국사를 이야기하였다.

  , 주 두 사람에게 듣건대 김주경은 몸을 숨긴 후로 붓장사를 하여서 수만 금을

모았다가 금천에서 객사하였는데, 그 유산은 주경이 묵던 주막집 주인이 먹어 버리고

주경의 유족에게는 한 푼도 아니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김주경이 그렇게 돈을 모은

것은 필시 무슨 경륜이 있었으리라고 말하였다. 주경의 아우 진경도 전라도에서

객사하여서 그 집이 말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심히 슬퍼하였다.

  여러 번 혼약이 되고도 깨어지던 나는 마침내 신천 사평동 최준례와 말썽 많은

혼인을 하였다. 준례는 본래 서울 태생으로, 그 어머니 김씨 부인이 젊은 과부로서

길러 낸 두 딸 중의 막내 딸이었다. 김씨 부인은 그때 구리개에 임시로 내었던

제중원(지금의 세브란스)에 고용되어서 두 딸을 길러 맏딸은 의사 신창희에게

시집보내고 신창희가 신천에서 개업하매 여덟 살 된 준례를 데리고 신천에 와서 사위의

집에 우접하여 있었다. 나는 양성칙 영수의 중매로 준례와 약혼하였는데 이 때문에

교회에 큰 문제가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준례의 어머니가 준례를

강성모라는 사람에게 허혼을 하였는데 준례는 어머니의 말을 아니 듣고 내게 허혼한

것이었다. 당시 18세인 준례는 혼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미국 선교사 한위렴,

군예분 두 분까지 나서서 준례더러 강성모에게 시집가라고 권하였으나 준례는 당연히

거절하였다. 내게 대하여도 이 혼인을 말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나는 본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부모의 허혼을 반대한다 하여 기어이 준례와 혼인하기로 작정하고

신창희로 하여금 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오게 하여 굳이 약혼을 한 뒤에 서울

정신여학교로 공부를 보내어 버렸다. 나와 준례는 교회에 반항한다는 죄로 책벌을

받았으나 얼마 후에 군예진 목사가 우리의 혼례서를 만들어 주고 두 사람의 책벌을

풀었으니 이리하여 나는 비로소 혼인한 사람이 되었다.

 

    4. 민족에 내놓은 몸

 

  을사신조약이 체결되어서 대한의 독립권이 깨어지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에

사방에서 지사와 산림학자들이 일어나서 경기, 충청, 경상, 강원 제도에 의병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허위, 이강년, 최익현, 민긍호, 유인석, 이진룡, 우동선 등은 다

의병대장으로 각각 일방의 웅이었다. 그들은 오직 하늘을 찌르는 의분이 있을 뿐이요,

군사의 지식이 없기 때문에 도처에서 패전하였다.

  이때에 나는 진남포 엡웜 청년회의 총무로서 대표의 임무를 띠고 경성대회에 출석케

되었다. 대회는 상동 교회에서 열렸는데 표면은 교회 사업을 의논한다 하나 속살은

순전한 애국운동의 회의였다. 의병을 일으킨 이들이 구사상의 애국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은 신사상의 애국운동이라 할 것이다.

  그때에 상동에 모인 인물은 전덕기, 정순만, 이준, 이동녕, 최재학, 계명륙, 김인즙,

옥관빈, 이승길, 차병수, 신상민, 김태연, 표영각, 조성환, 서상팔, 이항직, 이희간,

기산도, 김병헌(현재는 왕삼덕), 유두환, 김기홍 그리고 나 김구였다.

  우리가 회의한 결과로 작정한 것은 도끼를 메고 상소하는 것이었다. 1, 2회로

4, 5명씩 연명으로 상소하여 죽든지 잡혀 갇히든지 몇 번이고 반복하자는 것이었다.

  1회 상소하는 글은 이준이 짓고 최재학이 소주가 되고 그 밖의 네 사람이 더

서명하여 신민 대표로 다섯 명이 연명하였다. 상소를 하러 가기 전에 정순만의 인도로

우리 일동은 상동교회에 모여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가지 말고 죽기까지 일심하자고

맹약하는 기도를 올리고 일제히 대한문 앞으로 몰려갔다. 문 밖에 이르러 상소에

서명한 다섯 사람은 형식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소를 한다는 결의를 하였으나 기실

상소는 별감의 손을 통하여 벌써 대황제께 입람이 된 때였다.

  홀연 왜 순사대가 달려와서 우리에게 해산을 명하였다. 우리는 내정간섭이라 하여

일변 반항하며 일변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하여 우리 2천만 신민으로 노예를 삼는

조약을 억지로 맺으니 우리는 죽기로 싸우자고 격렬한 연설을 하였다. 마침내 왜

순사대는 상소에 이름을 둔 다섯 지사를 경무청으로 잡아가고 말았다.

  우리는 다섯 지사가 잡혀 가는 것을 보고 종로로 몰려와서 가두 연설을 시작하였다.

거기도 왜 순사가 와서 발검으로 군중을 해산하려 하므로 연설하던 청년 하나가

단신으로 달려 들어 왜 순사 하나를 발길로 차서 거꾸러뜨렸더니 왜 순사들은 총을

쏘았다. 우리는 어물전도가 불탄 자리에 쌓인 와륵을 던져서 왜 순사대와 접전을

하였다. 왜 순사대는 중과부적하여 중국인 점포에 들어가 숨어서 총을 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점포를 향하여 빗발같이 와륵을 던졌다. 이때에 왜 보병 한 중대가

달려와서 군중을 해산하고 한인을 잡히는 대로 포박하여 수십 명이나 잡아갔다.

  이날 민영환이 자살하였다 하므로 나는 몇 동지와 함께 민 댁에 가서 조상하고

돌아서 큰 길에 나서니, 40세나 되어 보이는 사람 하나가 맨상투바람으로 피묻은

흰 명주저고리를 입고 여러 사람에게 옹위되어서 인력거에 앉아 큰 소리를 내어 울며

끌려가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본 즉 참찬 이상설이 자살하려다가 미수한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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