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이튿날 조반 후에 어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숨숨 얽은, 50세나 되었음직한
사람이 서슴지 않고 사랑으로 들어오더니 내 앞에서 글을 배우고 있는 윤태를 보고,
"그 새에 퍽 컸구나. 안에 들어가서 작은 아버지 나오시래라 내가 왔다고."
하는 양이 이춘백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윽고 진경이가 윤태를 앞세우고 나와서 그 손님에게 인사를 한다.
"백씨 소식 못 들었지?"
"아직 아무 소식 없습니다."
"허어, 걱정이로군. 유인무의 편지 보았지?"
"네, 어제 받았습니다."
주객간에 이런 문답이 있고는 진경이가 장지를 닫아서 내가 앉아 있는 방을 막고
둘이서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는 아니 듣고 두 사람의 말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문답은 이러하였다.
"유인무란 양반이 지각이 없으시지, 김창수가 형님도 안 계신 우리 집에 왜
오리라고 자꾸 편지를 하는 거야요?"
"자네 말이 옳지마는 여기밖에 알아 볼 데가 없지 아니한가. 그가 해주 본 고향에
갔을 리는 없고 설사 그 집에서 김창수 있는 데를 알기로서니 발설을 할 리가 있겠나.
유인무로 말하면 아랫녁에 내려가 살다가 서울 다니러 왔던 길에 자네 백씨가
김창수를 구해 내려고 가산을 탕진하고 부지거처로 피신했다는 말을 듣고 나네 백씨의
의기를 장히 여겨서 아무리 하여서라도 김창수를 건져 내야 한다고 결심하였으나,
법으로 백씨가 할 것을 다하여도 안 되었으니 인제 힘으로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여서
열 세 명 결사대를 조직하였던 것일세.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야. 그래서 인천항 중요한
곳 7,8처에 석유를 한 통씩 지고 들어가서 불을 놓고 그 소란통에 옥을 깨뜨리고
김창수를 살려 내기로 하고 유인무가 나에게 두 사람을 데리고 인천에 가서 감옥
형편을 알아오라 하기로 가 본즉, 김창수는 벌써 사흘전에 다른 죄수 네 명을 데리고
달아난 뒤라 말이야. 일이 이렇게 된 것일세. 그러니 유인무가 자네 백씨나 김창수의
소식을 알고 싶어 할 것이 아닌가. 그래 정말 김창수한테서 무슨 편지라도 온 것이
없나?"
"편지도 없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회답을 기다릴 만하면 본인이 오지요."
"그도 그러이."
"이 생원께서는 인제 서울로 가시렵니까?"
"오늘은 친구나 몇 찾고 내일 가겠네. 떠날 때에 또 옴세."
이러한 문답이 있고 이춘백은 가 버렸다.
나는 유인무를 믿고 그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내게 그처럼 성의를 가진 사람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설사 그가 성의를 가장한 염탐꾼일는지 모른다 하여도 군자는
가기이방이라 의리로 알고 속은 것이 내 허물은 아니다. 이만큼 하는 데도 안
믿는다면 그것은 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진경에게 이튿날 이춘백이 오거든
나를 그에게 소개하기를 청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진경에게 내가 김창수라는 것을 자백하고 유인무를 만나기
위하여 이춘백을 따라서 떠날 것을 말하였다. 진경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형님이 과시 그러시면 제가 만류를 어찌합니까."
하고 인천옥에 사령반수로서 처음으로 김주경에게 내 말을 알린 최덕만은 작년에
죽었다는 말을 하고 학동들에게는 선생님이 오늘 본댁에를 가시니 다들 집으로
돌아가라 하여 돌려보냈다.
이윽고 이춘백이 왔다. 진경은 그에게 나를 소개하였다. 나도 서울을 가니
동행하자고 하였더니 이춘백은 보통 길동무로 알고 좋다고 하였다. 진경은 춘백의
소매를 끌고 뒷방에 들어가서 내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나는 이춘백과 함께 진경의 집을 떠났다. 남문통에는 30명 학동과 그
학부형들이 길이 메이도록 모여서 나를 전송하였다. 내가 도무지 아무 훈료도 아니
받고 심혈을 기울여서 가르친 것이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준 모양이어서 나는 기뻤다.
우리는 당일로 공덕리 박진사 태병의 집에 도착하였다. 이춘백이 먼저 안사랑으로
들어가서 얼마 있더니 키는 중키가 못 되고 얼굴은 볕에 그을려 가무스름하고 망건에
검은 갓을 쓰고 검소한 옷을 입은 생원님 한 분이 나와서 나를 방으로 맞아 들였다.
"내가 유인무요, 오시기에 신고하셨소. 남아하처불상봉이라더니 마침내 창수 형을
만나고 말았소."
하고 유인무는 희색이 만면하여 춘백을 보며,
"무슨 일이고 한두 번 실패한다손 낙심할 것이 아니란 말일세. 끝끝내 구하면
반드시 얻는 날이 있단 말야. 전일에도 안 그러던가."
하는 말에서 나는 그네가 나를 찾던 심경을 엿볼 수가 있었다.
나는 유인무에게,
"강화 김주경 댁에서 선생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허다한 근로하신 것을 알았고,
오늘 존안을 뵈옵거니와 세상에서 침소봉대로 전하는 말을 들으시고 이제 실물로
보시니 낙심되실 줄 아오. 부끄럽소이다."
하였다.
"내가 내 과거를 검사하였더니 용두사미란 말요."
유인무는,
"뱀의 꼬리를 붙들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보겠지요."
하고 웃었다.
주인 박태병은 유인무와 동서라고 하였다. 나는 박진사 집에서 저녁을 먹고 문안
유인무의 숙소로 가서 거기서 묵으면서 음식점에 가서 놀기도 하고 구경도 하고
돌아다녔다. 며칠을 지나서 유인무는 편지 한 장과 노자를 주어 나를 충청도 연산
광이다리 도림리 이천경의 집으로 지시하였다. 이천경은 흔연히 나를 맞아서 한
달이나 잘 먹이고 잘 이야기하다가 또 편지 한 장과 노자를 주어서 나를 전라도
무주읍에서 삼포를 하는 이시발에게 보냈다. 이시발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또
이시발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지례군 천곡 성태영을 찾아갔다. 성태영의 조부가 원주
목사를 지냈으므로 성 원주 댁이라고 불렀다. 대문을 들어서니 수청방, 상노방에
하인이 수십 명이요, 사랑에 앉은 사람들은 다 귀족의 풍이 있었다. 주인 성태영이
내가 전하는 이시발의 편지를 보더니 나를 크게 환영하여 상좌에 앉히니 하인들의
대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성태영의 자는 능하요, 호는 일주였다. 성태영은 나를 이끌고
혹은 산에 올라 나물을 캐며 혹은 물에 나아가 고기를 보는 취미있는 소일을 하고,
혹은 등하에 고금사를 문답하여 어언 일삭이 되었는데, 하루는 유인무가 성태영의
집에 왔다. 반가이 만나서 성태영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같은
무주 읍내에 있는 유인무의 집으로 같이 가서 그로부터는 거기서 숙식을 하였다.
유인무는 내가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불편하리라 하여 이름은 거북 구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 호를 연하라고 지어 주었다. 그리고 나를 부를 때에는
연하라는 호를 썼다.
유인무는 큰 딸은 시집을 가고 집에는 아들 형제가 있는데, 맏이의 이름은
한경이었고 무주 군수 이탁도 그와 연척인 듯하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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