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배천을 떠나 재령 양원학교에서 유림을 소집하여 교육의 필요와 계획을 말하고
장연 군수의 청으로 읍내와 각 면을 순회하고, 송화 군수 성낙영의 간청으로 수년
만에 송화읍을 찾았다. 이곳은 해서의 의병을 토벌하던 요해지이므로 읍내에는 왜의
수비대, 헌병대, 경찰서, 우편국 등의 기관이 있어서 관사를 전부 그런 것에 점령이
되고 정작 군수는 사가를 빌어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분한 마음에 머리카락이
가락가락 일어날 지경이었다.
환등회를 여니 남녀 청중이 무려 수천 명이니, 군수 성낙영, 세무서장 구자록을
위시하여 각 관청의 관리며 왜의 장교와 경관들도 많이 출석하였다. 나는 대황제
폐하의 어진영을 뫼셔오라 하여 강단 정면에 봉안하고 일동 기립 국궁을 명하고 왜의
장교들까지 다 그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니 벌써 무언중에 장내에는 엄중한 기운이
돌았다.
나는 '한인이 배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고.'하는 연제로 일장의 연설을 하였다. 과거
일청, 일아 두 전쟁 때에는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신뢰하는 감정이 극히 두터웠다. 그
후에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 주권을 상하는 조약을 맺음으로 우리의 악감이
격발되었다. 또 일병이 촌락으로 횡행하며 남의 집에 막 들어가고 닭이나 달걀을 막
빼앗아서 약탈의 행동을 하므로 우리는 배일을 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일본의
잘못이요 한인이 책임이 아니라고 탁을 두드리며 외쳤다. 자리를 돌아보니 성낙영.
구자록은 낯빛이 흙빛이요, 일반 청중의 얼굴에는 격앙의 빛이 완연하고 왜인의
눈에는 노기가 등등하였다. 홀연 경찰이 환등회의 해산을 명하고 나는 경찰서로 불려
가서 한인 감독 순사 숙직실에 구류되었다. 각 학교 학생들의 위문대가 뒤를 이어
밤이 새도록 나를 찾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하르빈 전보라 하여 이등박문이 '은치안'이라는 한인의 손에 죽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은치안'이 누구일까 하고 궁금하였더니 이튿날 신문으로 그것이
안응칠 중근인 줄을 알고 십 수년 전 내가 청계동에서 보던 총 잘 쏘던 소년을
회상하였다.
나는 내가 구금된 것이 안중근 관계인 것을 알고 오래 놓이지 못할 것을
각오하였다. 한 달이나 지난 후에 나를 불러 내어서 몇 마디를 묻고는 해주
지방법원으로 압송되었다. 수교장을 지날 때에 감승무의 집에서 낮참을 하는데, 시내
학교의 교직원들이 교육 공로자인 나를 위하여 한턱의 위로연을 베풀게 하여 달라고
호송하는 왜 순사에게 청하였더니 내가 해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하면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곧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튿날 검사정에 불려 안중근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나 나는 그 부친과 세의가 있을 뿐이요, 안중근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검사는 지나간 수년간의 내 행적을 적은 책을 내어놓고
이것저것 심문하였으나 결국 불기소로 방면이 되었다.
나는 행구를 가지고 감옥에서 나와서 박창진의 책사로 갔다가 유훈영을 만나 그
아버지 유장단의 환갑연에 참예하고 송화에서 나를 호송해 올 때에 왜 순사와 같이
왔던 한인 순사들이 내 일의 하회를 알고 가려고 아직도 해주에 묵고 있단 말을 듣고
그들 전부를 술집에 청하여서 한턱을 먹이고 지난 일을 말하여서 돌려보냈다. 한인
순사는 기회만 있으면 왜 순사의 눈을 피하여 내게 동정하였던 것이다.
안악 동지들은 내 일을 염려하여 한정교를 위해 해주로 보내어 왔으므로 나는
이승준, 김영택, 양낙주 등 몇 친구를 방문하고는 곧 안악으로 돌아왔다.
안악에 와서 나는 양산학교 소학부의 유년반을 담임하면서 재령군 북률면 무상동
보강학교의 교장을 겸무하였다. 이 학교는 나무리벌의 한 끝에 있어 가난한 사람들이
힘을 내어 세운 것이었다. 전임 교원으로는 전승근이 있고 장덕준은 반 교사, 반
학생으로 그 아우 덕수를 데리고 학교 안에서 숙식하고 있었다.
내가 보강학교 교장이 된 뒤에 우스운 삽화가 있었다. 그것은 학교에 세 번이나
도깨비불이 났다는 것이다. 학교를 지을 때에 옆에 있는 고목을 찍어서 불을
때었으므로 도깨비가 불을 놓는 것이니 이것을 막으려면 부군당에 치성을 드려야
한다고 다들 말하였다. 나는 직원을 명하여 밤에 숨어서 지키라 하였다. 이틀 만에
불을 놓는 도깨비를 등시 포착하고 보니 동네 서당의 훈장이었다. 그는 학교가 서기
때문에 서당이 없어서 제가 직업을 잃은 것이 분하여서 이렇게 학교에 불을 놓는
것이라고 자백하였다. 나는 그를 경찰서에 보내지 아니하고 동네를 떠나라고 명하였다.
이 지방에는 큰 부자는 없으나 나무리가 크고 살진 벌이 있어서 다들 가난하지는
아니하였다. 또 주민들이 다 명민하여서 시대의 변천을 잘 깨달아 운수, 진초, 보강,
기독 등 학교들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는 한편으로는 농무회를 조직하여 농업의 발달을
도모하는 등 공익사업에 착안함이 실로 보암직하였다. 의사 나석주도 이곳 사람이다.
아직 20내외의 청년으로서 소년, 소녀 8, 9명을 배에 싣고 왜의 철망을 벗어나 중국
방면에 가서 마음대로 교육할 양으로 떠나가 장연 오리포에서 왜경에게 붙들려서 여러
달 옥고를 받고 나와서 겉으로는 장사도 하고 농사도 한다 하면서 속으로 청년간에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직접 간접으로 교육에 힘을 써서 나무리벌 청년의 신망을 받는
중심 인물이 되어 있었다. 나는 종종 나무리에 내왕하면서 그와 만났다.
하루는 안악에서 노백린을 만났다. 그는 그때에 육군정령의 군직을 버리고 그의
향리인 풍천에서 교육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서울로 가는 길에 안악을 지나는
것이었다. 나는 부강학교로 갈 겸 그와 작반하여 나무리 진초등 김정홍의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김은 그 동네의 교육가였다.
저녁에 진초 학교 직원들도 와서 주연을 벌이고 있노라니 동네가 갑자기
요란하여졌다. 주인 김정흥이 놀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설명하는 말이 이러하였다.
진초학교에 오인성이라는 여교원이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그의 남편 이재명이
와서 단총으로 오인성을 위협하여 인성은 학교 일을 못 보고 어느 집에 피신하여
있는데 이재명은 매국적을 모조리 죽인다고 부르짖으면서 미쳐 날뛰며 방포를 하므로
동네가 이렇게 소란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노백린과 상의하고 이재명이라는 사람을 불러왔다. 그는 22, 3세의 청년으로서
미우에 가득하게 분기를 띠고 들어섰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자기는 어려서 하와이에
건너가서 거기서 공부를 하던 중에 우리나라가 왜에게 빼앗긴다는 말을 듣고 두어 달
전에 환국하였다는 말과, 제 목적은 이완용 이하의 매국적을 죽임에 있다 하여 단도와
권총을 내어 보이고, 또 자기는 평양에서 오인성이라는 여자와 결혼하였는데 그가
남편의 충의의 뜻을 몰라본다는 말을 기탄없이 하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역사 > 국사-근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33 (0) | 2010.07.10 |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32 (0) | 2010.07.10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31 (0) | 2010.07.10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30 (0) | 2010.07.10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9 (0) | 2010.07.10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7 (0) | 2010.07.10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6 (0) | 2010.07.10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5 (0) | 2010.07.10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4 (0) | 2010.07.10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3 (0) | 2010.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