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5

올드코난 2010. 7. 10.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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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집상 중에 아무 데도 출입을 아니하고 준영 계부의 농사를 도와 드렸더니

계부는 매우 나를 기특하게 여기시는 모양이어서 당신이 돈 2백 냥을 내어서 이웃

동네 어떤 상놈의 딸과 혼인을 하라고 내게 명령하셨다. 아버지도 없는 조카를 당신의

힘으로 장가들이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또 큰 영광으로 아시는 준영 계부는 내가

돈을 쓰고 하는 혼인이면 정승의 딸이라도 나는 아니한다고 거절하는 것을 보시고

대로 하여 낫을 들고 내게 달려 드시는 것을, 어머니께서 가로 막아서 나를 피하게

하여 주셨다.

  임인년 정월에 장연 먼 촌 일가 댁에 세배를 갔더니, 내게 할머니 되는 어른이 그

친정 당질녀로 17세 되는 처녀가 있으니 장가들 마음이 없는가고 물었다. 나는 세

가지 조건에만 맞으면 혼인한다고 말하였다. 세 가지라는 것은, 돈 말이 없을 것과

신부될 사람이 학식이 있을 것과 당자와 서로 대면하여서 말을 해볼 것 등이었다.

  어떤 날 할머니는 나를 끌고 그 처자의 집으로 갔다. 그 처자의 어머니는 딸

4형제를 둔 과댁으로서, 위로 3형제는 다 시집을 가고 지금 나와 말이 되는 이는

여옥이라는 끝의 딸이었다. 여옥은 국문을 깨치고 바느질을 잘 가르쳤다고 하였다.

집은 오막살이여서 더할 수 없이 작은 집이었다.

  나를 방에 들여 앉혀 놓고 세 사람이 부엌에서 한참이나 쑥덕거리더니, 다른 것은

다하여도 당자 대면 만은 어렵다고 하였다.

  "나와 대면하기를 꺼리는 여자라면 내 아내가 될 자격이 없소."

하고 내가 강경하게 나간 결과로 처녀를 불러들였다.

  나는 처자를 향하여 인사말을 붙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다.

나는 다시,

  "당신이 나와 혼인할 마음이 있소?"

하고 물었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나는 또,

  "내가 지금 상중이니 일년 후에 탈상을 하고야 성례를 할 터인데, 그동안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내게 글을 배우겠소?"

하고 물었다. 그래도 처녀의 대답 소리가 내 귀에는 아니 들렸는데, 할머니와 처녀의

어머니는 여옥이가 다 그런다고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이리하여서 그와 나와는 약혼이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내가 이러이러한 처자와 약혼하였다는 말을 하여도 준영 계부는 믿지

아니하고 어머니더러 가서 보고 오시라고 하시더니 어머니께서 알아보고 오신 뒤에야

준영 계부가,

  "세상에 어수룩한 사람도 있다."고 빈정거리셨다.

  나는 여자 독본이라 할 만한 것을 한 권 만들어서 틈만 나면 내 아내될 사람을

가르쳤다.

  어느덧 일년도 지나서 계묘년 2월에 아버지의 담제도 끝나고 어머니께서는 어서

나를 성례시켜야 한다고 분주하실 때에 여옥의 병이 위급하다는 기별이 왔다. 내가

놀라서 달려갔을 때에는 아직도 여옥은 나를 반겨할 정신이 있었으나 내가 간 지

사흘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 나는 손수, 그를 염습하여 남산에 안장하고 장모는 김동

김윤오 집에 인도하여 예수를 믿고 여생을 보내도록 하였다. 내 나이 30에 이 일을

당한 것이었다.

  이 해 2월에 장연읍 사직동으로 반이하였다. 오진사 인형이 나로 하여금 집 걱정이

없이 공공사업에 종사케 하기 위하여 내게 준 가대로서 20여 마지기 전답에 산과

과수까지 낀 것이었다. 해주에서 종형 태수 부처를 옮겨다가 집일을 보게 하고 나는

오 진사 집 사랑에 학교를 설립하고 오 진사의 딸 신애, 아들 기원, 오봉형의 아들 둘,

오면형의 아들과 딸, 오순형의 딸 형제와 그 밖에 남녀 몇 아이를 모아서 생도로

삼았다.

  방 중간을 병풍으로 막아 남녀의 자리를 구별하였다. 순형은 인형의 세째 아우로서

사람이 근실하고 예수를 잘 믿어 교육에 열심하여서 나와 함께 학생을 가르치고

예수교를 전도하여 일년 이내에 교회도 흥왕하고 학교도 차차 확장되었다. 당시에

주색장으로 출입하던 백남훈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어 봉양학교의 교원이 되게 하고

나는 공립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당시 황해도에서 학교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공립으로 해주와 장연에 각각 하나씩 있었을 뿐인데, 해주에 있는 것은 이름만

학교여서 여전히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있었고, 정말 칠판을 걸고 산술, 지리, 역사 등

신학문을 가르친 것은 장연학교 뿐이었다.

  여름에 평양 예수교의 주최인 사범 강습소에 갔을 적에 최광옥을 만났다. 그는

숭실중학교의 학생이면서 교육가로, 애국자로 이름이 높았고 나와도 뜻이 맞았다.

최광옥은 내가 아직 혼자라는 말을 듣고 안신호라는 신여성과 결혼하기를 권하였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영매로 나이는 스무 살, 극히 활발하고 당시 신여성 중에

명성이라고 최광옥은 말하였다.

  나는 안 도산의 장인 이석관의 집에서 안신호와 처음 만났다. 주인 이씨와 최광옥과

함께였다. 회견이 끝나고 사관에 돌아왔더니 최광옥이 뒤따라와서 안신호의 승낙을

얻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신호와 혼인이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이튿날 이석관과 최광옥이 달려와서 혼약이 깨졌다고 내게 알렸다. 그 까닭이라는

것은 이러하였다. 안 도산이 미국으로 가는 길에 상해 어느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양주삼에게 신호와의 혼인 말을 하고, 양주삼이 졸업하기를 기다려서 결정하라는 말을

신호에게도 편지로 한 일이 있었는데, 어제 나와 약혼이 된 뒤에 양주삼에게서 이제는

학교를 졸업하였으니 허혼하라는 편지가 왔다. 이 편지를 받고 밤새도록 고통한

신호는 두 손에 떡이라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기도 어려워 양주삼과 김구를

둘 다 거절하고 한 동네에 자라난 김성택(뒤에 목사가 되었다)과 혼인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가내하거니와 퍽 마음에 섭섭하였다. 그러자 얼마

아니하여 신호가 몸소 나를 찾아와서 미안한 말을 하고 나를 오라비라 부르겠다고

말하여 나는 그의 쾌쾌한 결단성을 도리어 흠모하였다.

  한 번은 군수 윤구영이 나를 불러 해주에 가서 농상공부에서 보내는 뽕나무 묘목을

찾아오는 일을 맡겼다. 수리 정창극이 나를 군수에게 추천한 것이었다. 나는 2백 냥

노자를 타 가지고 걸어서 해주로 갔다. 말이나 교군을 타라는 것이었지만 아니 탔다.

  해주에는 농상공부 주사가 특파되어 와서 묘목을 각군에 배부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전국에 양잠을 장려하노라고 일본으로부터 뽕나무 묘목을 실어 들여온 것이다.

  묘목은 다 마른 것이었다. 나는 마른 묘목을 무엇하느냐고 아니 받는다고 하였더니

농상공부 주사는 대로하여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느냐고 나를 꾸짖었다. 나도 마주

대로하여 나라에서 보내시는 묘목을 마르게 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하고 관찰부에 이 사유를 보고한다고 하였더니, 주사는 겁이 나는 모양이어서 나에게

생생한 것으로 마음대로 골라 가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이리하여 산 묘목 수천 본을

골라서 말에 싣고 돌아왔다. 노자는 모두 일흔 냥을 쓰고 일백 서른 냥을 정창극에게

돌렸다. 나는 집세기 한 켤레에 얼마, 냉면 한 그릇에 얼마, 이 모양으로 돈 쓴 데를

자세히 적어서 남은 돈과 함께 주었다. 정창극은 그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여,

  "사람들이 다 선생 같으면 나라 일이 걱정이 없겠소. 다른 사람이 갔더면 적어도

2백 냥은 더 청구했을 것이오."

하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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