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7

올드코난 2010. 7. 1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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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당초 상동회의에서는 몇 번이고 상소를 반복하려 하였으나 으례 사형에 처할 줄

알았던 최재학 이하는 흐지부지 효유방송이나 할 모양이어서 큰 문제도 되지 않는 것

같았고, 또 정세를 돌아보니 상소 같은 것으로 무슨 효과가 생길 것 같지도

아니하여서 우리 동지들은 방침을 고쳐서 각각 전국에 흩어져 교육사업에 힘을 쓰기로

하였다. 지식이 멸이하고 애국심이 박약한 이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가 곧 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아무 것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황해도로 내려와서 문화 초리면 종산 서명의숙의 교원이

되었다가 이듬해 김용제 등 지기의 초청으로 안악으로 이사하여 그곳 양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종산에서 안악으로 떠나온 것이 기유년 정월 18일이라 갓난 첫딸이

찬바람을 쐬서 안악에 오는 길로 죽었다.

  안악에는 김용제, 김용진 등 종형제와 그들의 자질 김홍량과 최명식 같은 지사들이

있어서 신교육에 열심하였다. 이때에는 안악 뿐이 아니라 각처에 학교가 많이

일어났으나 신지식을 가진 교원이 부족한 때라 당시 교육가로 이름이 높은 최광옥을

평양으로부터 연빙하여 안악 양산학교에 하기 사범강습회를 여니 사숙훈장들까지

강습생으로 오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있었다. 멀리 경기도, 충청도에서까지 와서

강습생이 사백여 명에 달하였다. 강사로는 김홍량, 이시복, 이상진, 한필호,

이보경(지금은 광수), 김낙영, 최재원 등이요, 여자 강사로는 김낙희, 방신영 등이

있었고, 강구봉, 박혜명 같은 중도 강습생 중에 끼어 있었다.

  박혜명은 전에 말한 일이 있는 마곡사 시대의 사형으로, 연전 서울서 서로 작별한

뒤에는 소식을 몰랐다가 이번 강습회에 서로 만나니 반갑기 그지 없었다. 그는 당시

구월산 패엽사의 주지였다. 나는 그를 양산학교의 사무실로 인도하여 내 형이라고

소개하고 내 친구들이 그를 내 친형으로 대우하기를 청하였다.

  혜명에게 들은즉 내 은사 보경당, 하은당은 석유 한 초롱을 사다가 그 호부를

시험하노라고 불붙은 막대기를 석유통에 넣었다가 그것이 폭발하여 포봉당까지 세

분이 일시에 죽었고, 그 남긴 재산을 맡기기 위하여 금강산에 내가 있는 곳을 두루

찾았으나 종적을 몰라서 할 수 없이 유산 전부를 사중에 붙였다고 하였다.

  나는 여기서 김효영 선생의 일을 아니 적을 수 없다. 선생은 김용진의 부친이요,

김홍량의 조부다. 젊어서 글을 읽더니 집이 가난함을 한탄하여 황해도 소산인 면포를

사서 몸소 등에 지고 평안도 강계, 초산 등 산읍으로 행상을 하여서 밑천을 잡아

가지고 근검으로 치부한 이라는데, 내가 가서 교사가 되었을 때에는 벌써 연세가 70

넘고 허리가 기억자로 굽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탈속하여 보매 위엄이

있었다. 선생은 일찍부터 신교육이 필요함을 깨닫고 그 장손 홍량을 일본에 유학케

하였다. 한 번은 양산학교가 경영난에 빠졌을 때에 무명씨로 벼 백 석을 기부하였는데,

나중에야 그가 자여질에게도 알리지 아니하고 한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 나로 말하면

선생의 자질의 연배건마는 며칠에 한 번씩 정해 놓고 내 집 문전에 와서,

  "선생님 평안하시오?"

하고 문안을 하였다. 이것은 자손의 스승을 존경하는 성의를 보임인 동시에 사마골

오백금 격이라고 나는 탄복하였다.

  나는 교육에 종사한 이래로 성묘도 못하고 있다가 여러 해만에 본 해주 본향에 가

보니 많은 변화가 생겼다. 첫째로 감개무량한 것은 나를 안아 주고 귀애해 주던

노인들이 많이 세상을 떠나고 전에는 어린아이던 것들이 인제는 커다란 어른들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막히는 것은 그 어른된 사람들이 아무 지각이 나지 아니하여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었다.

  예전에 양반이라는 사람들도 찾아 보았으나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효몽한 중에

있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권하면 머리를 깎으니만 못한다 하고 있었다. 내게

대하여서는 전과 같이 아주 하대는 못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어물어물하였다.

상놈은 여전히 상놈이요, 양반은 새로운 상놈이 될 뿐, 한 번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쳐서 새로운 양반이 되리라는 기개를 볼 수 없으니 한심한 일이었다.

  고향에 와서 이렇게 실망되는 일이 많은 중에 가장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준형

계부께서 나를 사랑하심이었다. 항상 나를 집안을 망칠 난봉으로 아시다가 내가

장연에서 오 진사의 신임과 존경을 받는 것을 목도하시고부터는 비로소 나를

믿으셨다.

  나는 본향 사람들을 모아 놓고 내가 지고 온 환등을 보이면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삼천리 강토와 2천만 동포에게 충성을 다하여라."

하고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안악에서는 하기사범강습소를 마친 뒤에 양산학교를 크게 확장하여 중학부와

소학부를 두고 김 홍량이 교장이 되었다.

  나는 최광옥 등 교육가들과 함께 해서 교육총회를 조직하고 내가 그 학무총감이

되었다. 황해도 내에 학교를 많이 설립하고 그것을 잘 경영하도록 설도하는 것이 내

직무였다. 나는 이 사명을 띠고 도내 각 군을 순회하는 길을 떠났다.

  배천 순수 전봉훈의 초청을 받았다. 읍 못 미쳐 오리정에 군내 각 면의 주민들이

나와서 등대하다가 내가 당도한즉 군수가 선창으로,

  "김구 선생 만세!"를 부르니 일동이 화하여 부른다. 나는 경황실색하여 손으로

군수의 입을 막으며

그것이 망발인 것을 말하였다. 만세라는 것은 오직 황제에 대하여서만 부르는 것이요,

황태자도 천세라고 밖에 못 부르는 것이 옛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일개 서민인

내게 만세를 부르니 내가 경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군수는 웃으며 내 손을

잡고 개화시대에는 친구 송영에도 만세를 부르는 법이니 안심하라고 하였다. 나는

군수의 사제에 머물렀다.

  전봉훈은 본시 재령 아전으로 해주에서 총순으로 오래 있을 때에 교육에 많은 힘을

썼다. 해주 정내학교를 세운 것도 그요, 각 전방에 명령하여 사환하는 아이들을 야학에

보내게 하고 만일 안 보내면 주인을 벌하는 일을 한 것도 그여서 해주 부내의 교육의

발달은 전총순의 힘으로 됨이 컸다. 그의 외아들은 조사하고 장손무길이 5, 6세였다.

  전 군수는 대단히 경골한 이어서 다른 고을에서는 일본 수비대에게 동헌을 내어

맡기되 그는 강경히 거절하여서 여전히 동헌은 군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왜의 미움을 받았으나 그는 벼슬자리를 탐내어 뜻을 굽힐 사람이 아니었다.

  전봉훈은 최광옥을 연빙하여 사범강습소를 설립하고 강연회를 각지에 열어 민중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최광옥은 배천 읍내에서 강연을 하는 중에 강단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황평양서 인사들이 그의 공적을 사모하고 뜻과 재주를 아껴서

사리원에 큰 기념비를 세우기로 하고 평양 안태국에게 비석 만드는 일을 맡기기까지

하였으나 합병조약에 되었기 때문에 중지하고 말았다. 최광옥의 유골은 배천읍 남산에

묻혀 있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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