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6

올드코난 2010. 7. 1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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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어느 날은 하오리에 게다를 신고 정부 문을 들어서다가 중국인 하인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동녕 선생과 기타 국무원들에게 한인인지 일인인지

판단키 어려운 인물을 정부 문 내에 출입시킨다는 책망을 받았고, 그때마다 조사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다고 변명하였으나 동지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이럭저럭 이씨와 폭탄도 돈도 다 준비가 되었다. 폭탄 한 개는 왕웅을 시켜 상해

병공창에서, 한 개는 김현을 하남성 유치한테 보내어 얻어온 것이니 모두

수류탄이었다. 이 중에 한 개는 일본 천황에게 쓸 것이요, 한 개는 이씨 자살용이었다.

  나는 거지 복색을 입고 돈을 몸에 지니고 거지 생활을 계속하니 아무도 내 품에

천여 원의 큰 돈이 든 줄을 아는 이가 없었다.

  1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이봉창 선생을 비밀리 법조계 중흥여사로 청하여 하룻밤을

같이 자며 이 선생이 일본에 갈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논을 하였다. 만일 자살이

실패되어 왜 관헌에게 심문을 받게 되거든 이 선생이 대답할 문구까지 일러주었다.

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나는 내 헌옷 주머니 속에 돈뭉치를 내어 이봉창

선생에게 주며 일본 갈 준비를 다하여 놓고 다시 오라 하고 서로 작별하였다.

  이틀 후에 그가 찾아왔기로 중흥여사에서 마지막 한 밤을 둘이 함께 잤다. 그때에

이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에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으로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게 주시나 하고, 내가 이 돈을 떼어 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과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길로 나는 그를 안공근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선서식을 행하고 폭탄 두 개를

주고 다시 그에게 돈 3백원을 주며 이 돈은 모두 동경까지 가기에 다 쓰고 동경 가서

전보만 하면 곧 돈을 더 보내마고 말하였다. 그리고 기념 사진을 찍을 때에 내 낯에는

처연한 빛이 있던 모양이어서 이씨가 나를 돌아보고,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

하고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띄운다. 나도 그를 따라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자동차에 올라 앉은 그는 나를 향하여 깊이 허리를 굽히고 홍구를 향하여 가

버렸다.

  10 여 일 후에 그는 동경에서 전보를 보내었는데 물품은 1 8일에 방매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곧 2백원을 전보환으로 부쳤더니, 편지로 미친놈처럼 돈을 다 쓰고

여관비 밥값이 밀렸던 차에 2백원 돈을 받아 주인의 빚을 청산하고도 돈이 남았다고

하였다.

  당시 정세로 말하면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을 떨치기로 보거나 또 만보산 사건,

만주사변 같은 것으로 우리 한인에 대하여 심히 악화된 중국인의 악감을 풀기로

보거나 무슨 새로운 국면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임시정부에서 회의한

결과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과 파괴공작을 하되, 돈이나 사람이나 내가 전담하여

하고 다만 그 결과를 정부에 보고하라는 전권을 위임받았었다. 1 8일이 임박하므로

나는 국무위원에 한하여 그동안 경과를 보고하여 두었었다. 기다리던 1 8일 중국

신문에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부중

  한국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명중하지 못했다.'

 

  이라고 하는 동경 전보가 게재되었다.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하였다는 것은 좋으나

맞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극히 불쾌하였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은 나를 위로하였다.

일본 천황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만은 못하나 우리 한인이 정신상으로는 그를 죽인

것이요, 또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니 이번 일은 성공으로 볼 것이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지들은 내

신변을 주의할 것을 부탁하였다.

  아니나다를까, 이튿날 조조에 프랑스 공무국으로부터 비밀리 통지가 왔다. 과거

10년간 프랑스 관헌이 김구를 보호하였으나, 이번 김구의 부하가 일황에게 폭탄을

던진 데 대하여서는 일본의 김구 체포 인도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 청도의 '국민일보'는 특호 활자로,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불행부중

  한국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 맞지 않음'

 

  이라고 썼다 하여 당지 주둔 일본 군대와 경찰이 그 신문사를 습격하여 파괴하였고,

그 밖에 장사 등 여러 신문에서도 '불행부중'이라고 문구를 썼다 하여 일본이 중국

정부에 엄중한 항의를 한 결과로 '불행'자를 쓴 신문사는 모두 폐쇄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상해에서 일본 중 하나가 중국인에게 맞아 죽었다는 것을 비밀로 하여

일본은 1.28 상해사변을 일으켰으니, 기실은 이봉창 의사의 일황 저격과 이에 대한

중국인의 '불행부중'이라고 말한 감정이 전쟁의 주요 원인인 것이었다.

  나는 동지들의 권에 의하여 낮에는 일체 활동을 쉬고, 밤에는 동지의 집이나 창기의

집에서 자고, 밥은 동포의 집으로 돌아 다니면서 얻어 먹었다. 동포들은 정성껏 나를

대접하였다.

  19로군의 채정해와 중앙군 제 5군장 장치중의 참전으로 일본군에 대한 상해 싸움은

가장 격렬하게 되어서 법조계 안에도 후방 병원이 설치되어 중국측 전사병의 시체와

전상병을 가뜩가뜩 실은 트럭이 피를 흘리고 왕래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언제 우리도

왜와 싸워 본국 강산을 피로 물들일 날이 올까 하도 눈물이 흘러 통행인들이 수상히

볼 것이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피해 버렸다.

  동경사건이 전하자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많은 편지가 오고 그 중에는 이번

중일 전쟁에 우리도 한몫 끼어 중국을 도와서 일본과 싸우는 일을 하라는 이도 있고,

적당한 사업을 한다면 거기 필요한 돈을 마련하마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중일전쟁에 한몫 끼이기는 임갈굴정이라 준비도 없이 무엇을 하랴. 나는 한인중에,

일본군 중에 노동자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그 비행기 격납고와 군수품 창고에

연소탄을 장치하여 이것을 태워 버릴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송호협정으로 중국이

일본에 굴복하여 상해전쟁이 끝을 막으니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송호협정의 중국측 전권은 곽태기였다.

  이에 나는 암살과 파괴계획을 계속하여 실시하려고 인물을 물색하였다. 내가 믿던

제자요 동지인 나석주는 벌써 연전에 서울 동양척식회사에 침입하여 7명의 일인을

쏘아 죽이고 자살하였고, 이승춘은 천진에서 붙들려 사형을 당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을

생각하여도 하릴없었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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