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새로 얻은 동지 이덕주, 유진식은 왜 총독의 암살을 명하여 먼저 본국으로 보냈고
유상근, 최흥식은 왜의 관동군 사령관 본장번의 암살을 명하여 만주로 보내려고 할
즈음에, 윤봉길이 나를 찾아왔다. 윤 군은 동포 박진이가 경영하는, 말총으로 모자
기타 일용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근래에는 홍구 소채장에서 소채 장수를 하던
사람이다.
윤봉길 군은 자기가 애초에 상해에 온 것이 무슨 큰 일을 하려 함이었고 소채를
지고 홍구 방면으로 돌아다닌 것도 무슨 기회를 기다렸던 것인데, 이제는 중일간의
전쟁도 끝이 났으니 아무리 보아도 죽을 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탄한 뒤에, 내게
동경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기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는 큰 뜻이 있는 것을 보고 기꺼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마침 그대와 같은 인물을 구하던 중이니 안심하시오."
그리고 나는 왜놈들이 이번 상해 싸움에 이긴 것으로 자못 의기양양하여 오는 4월
29일에 홍구 공원에서 그놈들의 소위 천장절 축하식을 성대히 거행한다 하니 이때에
한 번 큰 목적을 달래 봄이 어떠냐 하고 그 일의 계획을 말하였다. 내 말을 듣더니 윤
군은,
"할랍니다. 이제부텀은 마음이 편안합니다. 준비해 줍시오."
하고 쾌히 응낙하였다.
그 후, 왜의 신문인 상해 일일신문에 천장절 축하식에 참예하는 사람은 점심 벤또와
물통 하나와 일장기 하나를 휴대하라는 포고가 났다. 이 신문을 보고 나는 곧 서문로
왕웅(본명은 김홍일)을 방문하여 상해 병공창장 송식마에게 교섭하여 일인이 메는
물통과 벤또 그릇에 폭탄 장치를 하여 사흘 안에 보내주기를 부탁케 하였더니 왕웅이
다녀와서 말하기를 내가 친히 병공창으로 오라고 한다 하므로 가보니 기사 왕백수의
지도 밑에 물통과 벤또 그릇으로 만든 두 가지 폭탄의 성능을 시험하여 보여주었다.
시험 방법은 마당에 토굴을 파서 그 속의 사면을 철판으로 싸고 폭탄을 그 속에 넣고
뇌관에 긴 줄을 달아서 사람 하나가 수십 보 밖에 엎드려서 그 줄을 당기니 토굴
안에서 벼락소리가 나며 깨어진 철판 조각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주
장관이었다. 뇌관을 이 모양으로 20개나 실험하여서 한 번도 실패가 없는 것을 보고야
실물에 장치한다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이 병공창에서 정성을 들이는 까닭은
동경사건에 쓴 폭탄이 성능이 부족하였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때문이라고 왕
기사는 말하였다. 그래 20여 개 폭탄을 이 모양으로 무료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물통 폭탄과 벤또 폭탄을 병공창 자동차로 서문로 왕웅 군의 집까지 실어다
주었다. 이런 금물은 우리가 운반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 친절에서였다.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중국 거지 복색을 벗어 버리고 넝마전에 가서 양복 한 벌을 사 입어 엄연한
신사가 되어 가지고 하나씩 둘씩 이 폭탄을 날라다가, 법조계 안에 사는 친한 동포의
집에 주인에게도 그것이 무엇이라고는 알리지 아니하고, 다만 귀중한 약이니 불조심만
하라고 이르고 가마귀 떡 감추듯 이집 저집 집에를 가나 내외가 없었다. 더구나
동경사건 이래로 그러하여서 부인네들도 나와 허물없이 되어,
"선생님, 아이 좀 보아 주세요."
하고 우는 젖먹이를 내게 안겨 놓고 제 일들을 하였다. 내게 오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잘 논다는 소문이 났다.
4월 29일이 점점 박두하여 왔다. 윤봉길 군은 말쑥하게 일본식 양복을 사 입혀서
날마다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 것을 살펴서 그 당일에 자기가 행사할 적당한
위치를 고르게 하고 일변 백천대장의 사진이며 일본 국기 같은 것도 마련하게 하였다.
하루는 윤군이 홍구에 갔다가 와서,
"오늘 백천이 놈도 식장 설비하는 데 왔겠지요. 바로 내 곁에 와 선단 말야요. 내게
폭탄만 있었더면 그때에 해 버리는 겐데."
하고 아까워하였다. 나는 정색하고 윤군을 책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포수가 사냥을 하는 법이 앉은 새와 자는 짐승은 아니 쏜다는
것이오. 날려 놓고 쏘고 달려 놓고 쏘는 것이야. 윤군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내일 일에 자신이 없나 보구려."
윤 군은 내 말에 무료한 듯이,
"아니오. 그놈이 내 곁에 있는 것을 보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나더란 말입니다.
내일 일에 왜 자신이 없어요, 있지요."
하고 변명하였다.
나는 웃는 낯으로,
"나도 윤 군의 성공을 확신하오. 처음 이 계획을 내가 말할 때에 윤 군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지 않았소? 그것이 성공할 증거라고 나는 믿고 있소.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되오.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 마음이 움직이는 게요."
하고 내가 치하포에 토전양랑을 타살하려 할 때에 가슴이 울렁거리던 것과 고능선
선생에게 들은, '득수반지부족기 현애철수장부아'라는 글귀를 생각하매 마음이 고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니 윤 군은 마음에 새기는 모양이었다.
윤군을 여관으로 보내고 나는 폭탄 두 개를 가지고 김해산군 집으로 가서 김군
내외에게, 내일 윤봉길 군이 중대한 임무를 띠고 동삼성(만주라는 뜻)으로 떠나니,
고기를 사서 이른 조반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튿날은 4월 29일이었다. 나는 김해산 집에서 윤봉길 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
하였다. 밥을 먹으며 가만히 윤군의 기색을 살펴보니 그 태연자약함이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김해산 군은 윤군의 침착하고도 용감한 태도를 보고, 조용히 내게 이런 권고를
하였다.
"지금 상해에 민족 체면을 위하여 할 일이 많은데 윤군 같은 인물을 구태여 다른
데로 보낼 것은 무엇이요?"
"일은 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윤 군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내나
들어봅시다."
나는 김해산 군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식사도 끝나고 시계가 일곱 점을 친다. 윤군은 자기의 시계를 꺼내어 내게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군에게 주었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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