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1

올드코난 2010. 7. 1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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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다시 남경으로 돌아왔으나 왜는 내가 남경에 있는 냄새를 맡고 일변 중국

관헌에 대하여 나를 체포할 것을 요구하고 일변 암살대를 보내어 내 생명을 엿보고

있었다. 남경 경비사령관 곡정륜은 나를 면대하여 말하기를, 일본측에서 대역 김구를

체포할 것이니 입적 기타의 이유로 방해 말라 하기로, 자기가 김구를 잡거든 일본서

걸어 놓은 상금은 자기에게 달라고 대답하였으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또 사복 입은

일본 경관 일곱이 부자묘 부근으로 돌아다니더라는 말도 들었다.

  이에 나는 남경에서도 내 신변이 위험함을 깨닫고 회청교에 집 하나를 얻고

가흥에서 배 저어주던 주애보를 매삯 15원씩 주기로 하고 데려다가 동거하며, 직업은

고물상이요, 원적은 광동성 해남도라고 멀찍이 대었다. 혹시 경관이 호구조사를

오더라도 주애보가 나서서 설명하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본색을 탄로할 필요는

없었다.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일본에 대하여 항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재류한인의

인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 통일로 되었던 민족혁명당이 쪽쪽이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새로 생기고, 미주대한독립단은 탈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의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단과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모든 애국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점점 힘을 얻게 되었다.

  중일전쟁은 강남에까지 미쳐서 상해의 전투가 날로 중국에 불리하였다. 일본 공군의

남경 폭격도 갈수록 우심하여 회청교의 내가 들어있는 집도 폭격에 무너졌으나 나와

주애보는 간신히 죽기를 면하고 이웃에는 시체가 수두룩하였다. 나와보니 남경

각처에는 불이 일어나서 밤하늘은 붉은 모전과 같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무너진

집과 흩어진 시체 사이로 마로가에 어머니가 계신 집을 찾아 갔더니 어머니가 친히

문을 열으시며 놀라셨겠다는 나의 말에 어머니는,

  "놀라기는 무얼 놀라. 침대가 들썩들썩하드군."

하시고,

  "우리 사람은 상하지 않았나?"

하고 물으셨다.

  나는 그 길로 동포 사는 데를 돌아보았으나 남기가에 많이 있는 학생들도 다

무고하였다.

  남경의 정세가 위험하여 정부 각 기관도 중경으로 옮기게 되므로 우리 광복전선

삼당의 백여 명 대가족은 물가가 싼 장사로 피난하기로 정하고 상해, 행주에 있는

동지들에게 남경에 모이라는 지시를 하였다. 율양 고당암에게 선도를 공부하고 있는

양기탁에게도 같은 기별을 하였다. 그리고 안공근을 상해로 보내어 그 가권을

데려오되 그의 맏 형수 고 안중근 의사 부인을 꼭 모셔 오라고 신신 부탁하였더니

안공근이 돌아올 때에 보니 제 가권 뿐이요 안 의사 부인이 없으므로 나는 크게

책망하였다.

양반의 집에 불이 나면 신주부터 먼저 안아 뫼시는 법이어늘 혁명가가 피난을 하면서

나라 위하여 몸을 버린 의사의 부인을 적진중에 버리고 가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는

다만 안공근 한 집의 잘못만이 아니라 혁명가의 도덕에 어그러지고 우리 민족의

수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안공근은 피난하는 동포들의 단체에 들기를 원치 아니하므로

제 뜻에 맡겨 버렸다.

  나는 안휘 둔계중학에 재학중인 신아를 불러오고, 어머니를 모시고 영국 윤선으로

한구로 가고 대가족 백여 식구는 중국 목선 두 척에 행리까지 잔뜩 싣고 남경을

떠났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신아를 데리고 한구를 거쳐서 무사히 장사에 도착하였다.

선발대로 임시정부의 문부를 가지고 진강을 떠난 조성환, 조완구 등은 남경서 오는

일행보다 수일 먼저 도착하였고 목선으로 오는 대가족 일행도 풍랑은 겪었다. 하나

무고히 장사에 왔다. 남기가 사무소에서 부리던 중국인 채군이 무호 부근에서

풍랑중에 물을 길어 올리다가 실족하여 익사한 것이 유감이었다. 그는 사람이

충실하니 데리고 가라 하시는 어머님 명령으로 일행 중에 편입하였던 것이다.

  내가 남경서 데리고 있던 주애보는 거기를 떠날 때에 제 본향 가흥으로

돌려보내었다. 그 후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때에 여비 백원만 준 일이다. 그는

5년이나 가깝게 나를 광동인으로만 알고 섬겨 왔고 나와는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

중에 생겨서 실로 내게 대한 공로란 적지 아니한데,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 줄 알고

노자 이외에 돈이라도 넉넉하게 못 준 것이 참으로 유감천만이다.

  안공근의 식구는 중경으로 갔거니와 장사에 모인 백여 식구도 공동 생활을 할 줄

모르므로 저마다 방을 얻어서 제각기 밥을 짓는 살림을 하였다. 나도 어머니를 모시고

또 한 번 살림을 시작하여서 어머니가 손수 지어 주시는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 글을 쓰는 오늘날에는 이미 이 세상에 아니 계시다.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상권을 쓸 때와 같이 지난 일과 날짜도 많이 여쭈어 볼 것이건마는 이제는 어머니가

안 계시다.

  이 기회에 내가 상처 후에 어머니가 본국으로 가셨다가 다시 오시던 일을

기록하련다.

  어머니가 신아를 데리고 인천에 상륙하셨을 때에는 노자가 다 떨어졌었다. 그때에는

우리가 상해에서 조석이 어려워서 어머니가 중국 사람들의 쓰레기통에 버린 배추

떡잎을 뒤져다가 겨우 반찬을 만드시던 때라 노자를 넉넉히 드렸을 리가 만무하다.

  인천서 노자가 떨어진 어머니는 내가 말씀도 한 일이 없건마는 동아일보 지국으로

가셔서 사정을 말씀하셨다. 지국에서는 벌써 신문 보도로 어머니가 귀국하시는 것을

알았다 하면서 서울까지 차표를 사 드렸다. 어머님은 서울에 내려서는 동아일보사를

찾아가셨다. 동아일보사에서는 사리원까지 차표를 사드렸다.

  어머니는 해주 본향에 선영과 친족을 찾으시지 않고 안악 김씨 일문에서 미리

준비하여 놓은 집에 계시게 하였다.

  내가 인아를 데리고 있는 동안, 어머님은 당신의 생활비를 절약하셔서 때때로 내게

돈을 보내 주셨다.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사건이 생기매 경찰이 가끔 어머니를 괴롭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어머니께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나오시라고 기별하였다.

그때에는 내게는 어머니께서 굶지 않으시게 할 만한 힘이 있다고 여쭈었다.

  어머님은 중국으로 오실 결심을 하시고 안악 경찰서에 친히 가셔서 출국 허가를

청하였더니 의외에 좋다고 하므로 살림을 걷어치우셨다.

  그랬더니 서울 경무국으로부터 관리 하나가 안악으로 일부러 내려와서 어머니께,

경찰의 힘으로도 못 찾는 아들을 노인이 어떻게 찾느냐고, 그러니 출국 허가를

취소한다고 하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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