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3

올드코난 2010. 7. 1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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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광주에서는 중국 군대에 있는 동포 이준식, 채원개 두 분의 알선으로 동산백원을 임시

정부의 청사로, 아세아 여관을 전부 우리 대가족의 숙사로 쓰게 되었다. 이렇게 정부와

가족을 안돈하고 나는 안의사 미망인과 가족을 상해에서 나오게 할 계획으로 다시

향항으로 가서 안정근, 안공근 형제를 만나 강경하게 그 일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은

교통이 어렵다는 이유로 듣지 아니하였다. 사실상 그때 사정으로는 어렵기도 하였다.

나는 안의사의 유족을 적진 중에 둔 것과 율양고당암에서 중국 도사 임한정에게

선도를 공부하고 있던 양기탁을 구출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향항에서 이틀을 묵어서 광주로 돌아오니 거기도 왜의 폭격이 시작되었으므로 또

나는 어머님과 우리 대가족을 불산으로 이접하게 하였다. 이것은 오철성 주석의

호의와 주선에 의함이었다.

  이 모양으로 광주에서 두 달을 지나, 장개석 주석에게 우리도 중경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청하였더니 오라는 회전이 왔기로 조성환, 나태섭 두 동지를 대동하고 나는

다시 장사로 가서 장치중 주석에게 교섭하여 공로 차표석 장과 귀주성 주석 오정창

씨에게로 하는 소개장을 얻어 가지고 중경 길을 떠나 10여 일 만에 귀주성 수부

귀양에 도착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본 중국은 물산이 풍부한 지방뿐이었으나 귀주 지경에 들어서는 눈에

띄는 것이 모두 빈궁뿐이었다. 귀양 시중에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의복이 남루하고 혈색이 좋지 못하였다. 원체 산이 많은

지방인데다가 산들이 다 돌로 되고 흙이 적어서 농가에서는 바위 위에다 흙을 펴고

씨를 뿌리는 형편이었다. 그 중에도 한족은 좀 나으나 원주민인 묘족의 생활을 더욱

곤궁하고 야매한 모양이었다. 중국 말을 모르는 나는 말을 듣고 한족과 묘족을 구별할

수는 없으나 복색으로는 묘족의 여자를 알아낼 수 있고 안광으로는 묘족의 남자를

지적할 수가 있었다. 한족의 눈에는 문화의 빛이 있는데 묘족의 눈에는 그것이 없었다.

  묘족은 요순 시대의 삼묘씨의 자손으로서, 4천 년 이래로 이렇게 꼴사나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무슨 전생의 업보인고, 요순이후로는 역사상에 묘족의 이름이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기로 그들은 이미 다 절멸된 줄만 알았더니 호남 광동, 광서, 운남,

귀주, 사천, 서강 등지에 수십 백 종족으로 갈린 묘족이 퍼져 있으면서도 이렇게

소문이 없는 것은 그들 중에 인물이 나지 못한 까닭이다. 현재 광서의 백승희와

운남의 용운 두 장군이 묘족의 후예라 하는 말도 있으나 나는 그 진부를 단정할

자료를 가지지 못하였다.

  귀양에서 여드레를 묵어서 나는 무사히 중경에 도착하였으나 그동안 광주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우리 대가족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다 무사히 광주를

탈출하여 유주에 와 있다는 전보를 받고 안심하였다. 그들은 다 중경에 오기를

희망하므로 내가 교통부와 중앙당부에 교섭하여 자동차 여섯 대를 얻어서 기강이라는

곳에 대가족을 옮겨왔다. 군수품 운송에도 자동차가 극히 부족하던 이 때에 이렇게

빌어 준 중국의 호의는 이루 감사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내가 미주서 오는 통신을 기다리노라고 우정국(우편국)에 가 있는 때에 인아가 왔다.

유주에 계신 어머니는 병환이 중하신데 중경으로 오기를 원하시므로 모시고 온

것이었다. 내가 인아를 따라 달려가니 어머님은 내 여관인 저기문 홍빈여사 맞은편에

와 계셨다. 곧 내 여관으로 모시고 와서 하룻밤을 지내시게 하고 강남쪽 아궁보

손가화원에 있는 김홍서군 집으로 가 계시게 하였다. 이것은 김홍서 군이 호의로

자청한 것이었다.

  어머니의 병환은 인후증인데 의사의 말이 이것은 광서의 수토병으로, 젊은 사람이면

수술을 할 수 있으나 어머니 같은 노인으로서는 그리할 수도 없고 또 이미 치료할

시기를 놓쳐서 손 쓸 길이 없다고 하였다.

  어머님이 중경으로 오시는 일에 관하여 잊지 못할 은인이 있으니 그는 의사

유진동군과 그 부인 강영파 여사였다. 이 부처는 상해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나를

위하여 주던 사람들인데 쿨링에서 요양원 경영하던 것을 걷어치우고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나를 대신하여 내 어머니를 모시고 간호하기 위하여 중경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유의사 부처가 왔을 때는 벌써 더 손 쓸 수가 없게 되신 뒤였다.

  내가 중경에 와서 할 일은 세 가지였었다. 첫째는 차를 얻어서 대가족을 실어 오는

일이요, 둘째는 미주, 하와이와 연락하여 경제적 후원을 받는 일이요, 셋째로는

장사에서부터 말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여러 단체의 통일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대가족도 안돈이 되고 미주와 연락도 되었으므로 나는 세째 사업인 단체 통일에

착수하였다.

  나는 중경에서 강 건너 아궁보에 있는 조선의용대와 민족혁명당 본부를 찾았다.

당수 김약산은 계림에 있었으나 윤기섭, 성주식, 김홍서, 석정, 김두봉, 최석순, 김상덕

등 간부가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모든 단체를 통일하여

민족주의의 단일당을 만들 것을 제의하였더니 그 자리에 있던 이는 일치하여

찬성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여러 단체에도 참가를

권유하기로 결의하였다.

  미주와 하와이에서는 곧 회답이 왔다. 통일에는 찬성이나, 김약산은 공산주의자인즉

만일 내가 그와 일을 같이 한다면 그들은 나와의 관계까지도 끊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김약산과 상의한 결과 그와 나의 연명으로, 민족운동이야말로 조국

광복에 필요하다는 뜻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여기 의외의 고장이 생겼으니 그것은 국민당 간부들이 연합으로 하는 통일은

좋으나, 있던 당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합한 단일당을 조직하는 데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주의가 서로 다른 자는 도저히 한 조직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병을 무릅쓰고 기강으로 가서 국민당의 전체회의를 열고 노력한지 1개월 만에

비로소 단일당으로 모든 당들을 통일하자는 의견에 국민당의 합의를 얻었다. 그래서

민족운동 진영인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과 공산주의전선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위동맹, 조선혁명자연맹의 일곱으로 된

7당 통일 회의를 열게 되었다.

  회의가 진행됨에 따라 민족운동 편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해방동맹과

전위동맹은 민족운동을 위하여 공산주의의 조직을 해산할 수 없다고 말하고

퇴석하였다. 이렇게 되니 7당이 5당으로 줄어서 순전한 민족주의적인 새 당을

조직하고 8개조의 협정에 5당의 당수들이 서명하였다.

  이에 좌우 5당의 통일이 성공하였으므로 며칠을 쉬고 있던 차에, 이미 해산하였을

민족혁명당 대표 김약산이 돌연히 탈퇴를 선언하였으니, 그 이유는 당의 간부들과

그가 거느리는 청년의용대가 아무리 하여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만일 8개조의

협정을 수정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다 달아나겠다는 것이었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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