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7

올드코난 2010. 7. 1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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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세 번째 길로 나는 윤봉길 의사의 본댁을 찾으니 4 29일이라, 기념제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나는 일본 동경에 있는 박열 동지에게 부탁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 열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 오게 하고,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는 날

나는 특별 열차로 부산까지 갔다. 부산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분의 유골을 모신 열차가

정거하는 역마다 사회, 교육 각 단체며 일반 인사들이 모여 봉도식을 거행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자 유골을 담은 영구를 태고사에 봉안하여 동포들의 참배에 편케

하였다가 내가 친히 잡아 놓은 효창공원 안에 있는 자리에 매장하기로 하였다. 제일

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남기고 그 다음에 세 분의 유골을 차례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날 미국인 군정간부도 전부 회장하였으며 미국 군대까지 출동할 예정이었으나

그것은 중지되고 조선인 경찰관, 육해군 경비대, 정당, 단체, 교육기관, 공장의

종업원들이 총출동하고 일반 동포들도 구름같이 모여서 태고사로부터 효창공원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어 일시 전차, 자동차, 행인까지도 교통을 차단하였다.

  선두에는 애도하는 비곡을 아뢰는 음악대가 서고 다음에는 화환대, 만장대가 따르고

세 분 의사의 영여는 여학생대가 모시니 옛날 인산보다 더 성대한 장의였다.

  나는 삼남 지방을 순회하는 길에 보성군 득량면 득량리 김씨 촌을 찾았다. 내가

48년 전에 망명 중에 석 달이나 몸을 붙여 있던 곳이요 김씨네는 나와 동족이었다.

내가 온다는 선문을 듣고 동구에는 솔문을 세우고 길을 닦기까지 하였다. 남녀

동민들이 동구까지 나와서 도열하여 나를 맞았다.

  내가 그때에 유숙하던 김광언 댁을 찾으니 집은 예와 같으되 주인은 벌써 세상을

떠났었다. 그 유족의 환영을 받아 내가 그 때에 상을 받던 자리에서 한 때 음식대접을

한다 하여서 마루에 병풍을 치고 정결한 자리를 깔고 나를 앉혔다. 모인 이들 중에

나를 알아 보는 이는 늙은 부인네 한 분과 김판남 종씨 한 분뿐이었다. 김씨는 그때에

내 손으로 쓴 책 한 권을 가져다가 내게 보여주었다. 내가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에

자별히 친하게 지내던 나와 동갑인 선씨는 이미 작고하고 내게 필낭을 기워서 작별

선물로 주던 그의 부인은 보성읍에서 그 자손들을 데리고 나와서 나를 환영하여

주었다. 부인도 나와 동갑이라 하였다.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는 도중에서 함평 동포들이 길을 막고 들르라 하므로 나는

함평읍으로 가서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환영회에 한 차례 강연을 하고 나주로 갔다.

나주에서 육모정 이 진사의 집을 물은즉, 이 진사 집은 나주가 아니요, 지금 지나온

함평이며, 함평 환영회에서 나를 위하여 만세를 선창한 것이 바로 이 진사의

종손이라고 하였다. 오랜 세월에 나는 함평과 나주를 섞바꾼 것이었다. 그 후에 이

진사(나와 작별한 후에는 이 승지가 되었다 한다)의 종손 재승, 재혁 두 형제가 예물을

가지고 서울로 나를 찾아왔기로 함평을 나주로 잘못 기억하고 찾지 못하였던 것을

사과하였다.

  이 길에 김해에 들리니 마침 수로왕릉의 추향이라 김씨네와 허씨네가 많이 참배하는

중에 나도 그들이 준비하여 주어 평생 처음으로 사모와 각대로 참배하였다.

  전주에서는 옛벗 김형진의 아들 맹문과 그 종제 맹열과 그 내종형 최경열 세 사람을

만난 것이 기뻤다. 전주의 일반 환영회가 끝난 뒤에 이 세 사람의 가족과 한데 모여서

고인을 추억하며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강경에서 공종렬의 소식을 물으니 그는 젊어서 자살하고 자손도 없으며 내가 그

집에서 자던 날 밤의 비극은 친족간에 생긴 일이었다고 한다.

  그 후 강화에 김주경 선생의 집을 찾아 그의 친족들과 사진을 같이 찍고 내가

그때에 가르치던 30명 학동 중에 하나였다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개성, 연안 등을 순회하는 노차에 이 효자의 무덤을 찾았다.

  '고효자이창매지묘'

  나는 해주 감옥에서 인천 감옥으로 끌려가던 길에 이 묘비 앞에 쉬던 49년 전

옛날을 생각하면서 묘전에 절하고 그날 어머니가 앉으셨던 자리를 눈어림으로 찾아서

그 위에 내 몸을 던졌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의 뵈올 길이 없으니 앞이 캄캄하였다.

중경서 운명하실 때에 마지막 말씀으로,

  "내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하시던 것을 추억하였다.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고 모자가 함께 고국에 돌아가 함께 지난 일을 이야기하지 못하심이 그

원통하심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저 멀고 먼 서쪽 화상산 한 모퉁이에 손자와 같이

누워 계신 것을 생각하니 비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오셔서 내가

동포들에게 받는 환영을 보시기나 하여도 다소 어머니의 마음이 위안이 아니 될까.

  배천에서 최광옥 선생과 전봉훈 군수의 옛일을 추억하고 장단 고랑포에서 나의 선조

경순왕릉에 참배할 적에는 능말에 사는 경주 김씨들이 내가 오는 줄 알고 제전을

준비하였었다.

  나는 대한 나라 자주 독립의 날을 기다려서 다시 이 글을 계속하기로 하고 지금은

붓을 놓는다.

  서울 새문 밖에서 -하권 끝-

 

    .1나의 소원

 

  1. 민족 국가

  2. 정치 이념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11. 민족 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 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 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칠십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 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칠십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는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 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 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의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이,

  "내 차라리 계림(신라 때의 나라 이름)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을 물리치고 달게 죽음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이었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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