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호종남 장군은 출타하여서 참모장만을 만나고 성주석 축소주 선생은 나와 막역한
친우라 이튿날 그의 사저에서 석반을 같이하기로 하였다. 성당부에서는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개최한다 하고 서안 부인회에서는 나를 환영하기 위하여 특별히 연극을
준비한다 하고 서안의 각 신문사에서도 환영회를 개최하겠으니 출석하여 달라는
초청이 왔다.
나는 그 밤을 우리 동포 김종만씨 댁에서 지내고 이튿날은 서안의 명소를 대개
구경하고 저녁에는 어제 약속대로 축 주석 댁 만찬에 불려갔다. 식사를 마치고 객실에
돌아와 수박을 먹으며 담화를 하는 중에 문득 전령이 울었다. 축 주석은 놀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중경에서 무슨 소식이 있나 보다고 전화실로 가더니 잠시 후에 뛰어
나오며,
"왜적이 항복한다!"
하였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한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 보내어서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이 가석하거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의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더 있을 마음이 없어서 곧 축씨 댁에서 나왔다. 내 차가 큰 길에 나설 때에는
벌써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만세 소리가 성중에 진동하였다.
나는 서안에서 준비되고 있던 나를 위한 모든 환영회를 사퇴하고 즉시 두곡으로
돌아왔다. 와 보니 우리 광복군은 제 임무를 하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것을 실망하여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데 미국 교관들과 군인들은 질서를 잊으리만큼 기뻐 뛰고
있었다. 미국이 우리 광복군 수천 명을 수용할 병사를 건축하려고 일변 종남산에서
재목을 운반하고 벽돌가마에서 벽돌을 실어 나르던 것도 이날부터 일제히 중지하고
말았다. 내 이번 길의 목적은 서안에서 훈련받은 우리 군인들을 제 1차로 본국으로
보내고 그 길로 부양으로 가서 거기서 훈련받은 이들을 제 2차로 떠나보낸 후에
중경으로 돌아감이었으나 그 계획도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가 중경서 올
때에는 군용기를 탔으나 그리로 돌아갈 때에는 여객기를 타게 되었다.
중경에 와 보니 중국인들은 벌써 전쟁중의 긴장이 풀어져서 모두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고 우리 동포들은 지향할 바를 모르는 형편에 있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그동안
임시 의정원을 소집하여 혹은 임시 정부 국무위원의 총사직을 주장하고 혹은 이를
해산하고 본국으로 들어가자고 발론하여 귀결이 못나다가, 주석인 내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정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의정원에 나아가 해산도 총사직도 천부당하다고 단언하고, 서울에 들어가 전체
국민의 앞에 정부를 내어 바칠 때까지 현상대로 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여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미국측으로부터 서울에는 미국 군정부가 있으니 임시정부로는
입국을 허락할 수 없은즉 개인의 자격으로 오라 하기로 우리는 할 수 없이 개인의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7년간의 중경 생활을 마치게 되니, 실로 감개가 많아서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두서를 찾기가 어렵다.
나는 교자를 타고 강 건너 화강산에 있는 어머니 묘소와 아들 인의 무덤에 가서
꽃을 놓고 축문은 읽어 하직하고 묘지기를 불러 금품을 후히 주어 수호를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가죽 상지 여덟 개를 사서 정부의 모든 문서를 싸고 중경에 거주하는
5백여 명 동포의 선후책을 정하고, 임시정부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 중국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주중화대표단을 두어 박찬익을 단장으로 민필호, 이광, 이상만,
김은충 등을 단원으로 임명하였다.
우리가 중경을 떠나게 되매 중국공산당 본부에서는 주은래, 동필무 제씨가 임시정부
국무원 전원을 청하여 송별연을 하였고 중앙정부와 국민당에서는 장개석 부처를
위시하여 정부, 당부, 각계 요인 2백여 명이 모여 우리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간부들을 초청하여 국민당 중앙당부 대례당에서 중국기와 태극기를
교차하고 융숭하고도 간곡한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장개석 주석과 송미령 여사가
선두로 일어나 장래 중국과 한국 두 나라가 영구히 행복하게 되도록 하자는 축사가
있고 우리 편에서도 답사가 있었다.
중경을 떠나던 일을 기록하기 전에 7년간의 중경 생활에서 잊지 못할 것 몇 가지를
적으려 한다.
첫째 중경에 있던 우리 동포의 생활에 관하여서다. 중경은 원래 인구 몇 만밖에 안
되던 작은 도시였으나, 중앙정부가 이리로 옮겨온 후로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지방의
관리와 피난민이 모여들어서 일약 인구 백만에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아무리 새로
집을 지어도 미처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여름에는 한데에서 사는 사람에 수십만이나
되었다.
식량은 배급제여서 배급소 앞에는 언제나 장사진을 치고 서로 욕하고 때리고 하여
분규가 아니 일어나는 때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동포는 따로 인구를 선책하여서
한몫으로 양식을 타서 하인을 시켜 집집에 배급하기 때문에 대단히 편하였고 뜰을
쓸기까지 하였다. 먹을 물도 사용인을 시켜 길었다. 중경시 안에 사는 동포들 뿐만
아니라, 교외인 토교에 사는 이들도 한인촌을 이루고 중국 사람의 중산계급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간혹 부족하다는 불평도 있었으나 규율 있고 안전한 단체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나 자신의 중경 생활은 임시정부를 지고 피난하는 것이 일이요, 틈틈이 먹고 잤다고
할 수 있었다. 중경의 폭격이 점점 심하여 가매 임시정부도 네 번이나 옮겼다. 첫 번
정청인 양류가 집은 폭격에 견딜 수가 없어서 석판가로 옮겼다가 이 집이 폭격으로
일어난 불에 전소하여 의복까지 다 태우고 오사야항으로 갔다가 이 집이 또 폭격을
당하여 무너진 것을 고쳤으나 정청으로 쓸 수는 없어서 직원의 주택으로 하고 네
번째로 연화지에 70여 칸 집을 얻었는데 집세가 일년에 40만원이라, 그러나 이 돈은
장 주석의 보조를 받게 되어 임시정부가 중경을 떠날 때까지 이 집을 쓰고 있었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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