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4

올드코난 2010. 7. 1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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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이리하여 5당 통일도 실패되어서 나는 민족진영 3당의 동지들과 미주, 하와이 여러

단체에 대하여 나의 불명한 허물을 사과하고 이어서 원동에 있는 3당만을 통일하여

새로 한국독립당이 생기게 되었다. 하와이 애국단과 하와이 단합회가 각각 해소하고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가 되었으니 역시 5당 통일은 된 셈이었다.

  새로 된 한국독립당의 간부로는 집행위원장에 김구, 위원으로는 홍진, 조소앙,

조시원, 이청천, 김학규, 유동열, 안훈, 송병조, 조완구, 엄항섭, 김붕준, 양묵, 조성환,

차이석, 이복원이요, 감찰위원장에 이동녕, 위원에 이시영, 공진원, 김의한 등이었다.

  임시 의정원에는 나를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거하였는데, 종래의 주석을

국무위원이 번갈아 하던 제도를 고쳐서 대내. 대외에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국, 서울, 워싱턴에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 박사를 그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한편 중국 중앙정부에서는 우리 대가족을 위하여 토교 동감폭포 위에 기와집 세

채를 짓고 또 시가에도 집 한 채를 사주었으나 그 밖에 우리 독립운동을 원조하여

달라는 청에 대하여서는 냉담하였다. 그래서 나는 중국이 일본군의 손에 여러

대도시를 빼앗겨 자신의 항전에 골몰한 이때에 우리를 위한 원조를 바라기가 미안하니

나는 미국으로 가서 미국의 원조를 청할 의사인즉 여행권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즉

중앙정부의 서은증씨가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중국에 있었으니 중국에서 무슨 일을

하나 남김이 좋지 아니하냐 하고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기를 청하므로 나는 장래

독립한 한국의 국군의 기초가 될 광복군 조직의 계획을 제출하였더니 곧 좋다는

회답이 왔다.

  이에 임시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미주와 하와이

동포가 보내어 준 돈 4만원)을 다하여 중경 가능빈관에 중국인, 서양인 등 중요 인사를

초청하여 한국광복군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 명 간부를 서안으로

보내어 미리 가 있던 조성환 등과 합하여 한국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이범석을

1지대장으로 하여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본명 공진원)를 제 2지대장으로

하여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김학규를 제 3지대장으로 하여 산동으로 보내고, 나월환

등의 한국청년 전지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제 5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 3전구 사령부 정치부에서

일을 보고 있는 김문호를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을

회계조장, 이지일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조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대표하는 부녀위로총회로부터 중국 돈으로

10만원의 기부가 있었다.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지 못하여 몇 달 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여 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로, 학병으로 일본 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지대를 찾아온 것인데 지대장 김학규가 임시정부로 보낸

것이었다. 이 사실은 중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어 중한문화협회 식당에서 환영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양 여러 나라의 통신기자들이며 대사관원들도 출석하여 우리

학병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발하였다. 어려서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아 국어도 잘

모르는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고 총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시정부를 찾아왔다는 그들의 말에 우리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목이 메었거니와

외국인들도 감격에 넘친 모양이었다.

  이것을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어, 미국의 OSS(미국 전략

사무국)를 주관하는 싸전트 박사는 광복군 제 2지대장 이범석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쓰 중위는 제3지대장 김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게 비밀 훈련을

실시하였다. 예정대로 3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정탐과 파괴 공작의 임무를 띠고 그들을

비밀히 본국으로 파견할 준비가 된 때에 나는 미국 작전부장 다노배 장군과

군사협의를 하기 위하여 미국 비행기로 서안으로 갔다.

  회의는 광복군 제 2지대 본부 사무실에서 열렸는데 정면 오른쪽 태극기 밑에는 나와

2지대 간부가, 왼쪽 미국기 밑에는 다노배 장군과 미국인 훈련관들이 앉았다.

다노배 장군이 일어나,

  "오늘부터 아메리카 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적 일본을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된다."고 선언하였다.

  다노배 장군과 내가 정문으로 나올 때에 활동사진의 촬영이 있고 식이 끝났다.

  이튿날 미국 군관들의 요청으로 훈련받은 학생들의 실지 공작을 시험하기로 하여

두곡에서 동남으로 40, 옛날 한시에 유명한 종남산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동구에서

차를 버리고 5리쯤 걸어가면 한 고찰이 있는데 이것이 우리 청년들이 훈련을 받은

비밀 훈련소였다. 여기서 미국 군대식으로 오찬을 먹고 참외와 수박을 먹었다.

  첫째로 본 것은 심리학적으로 모험에 능한 자, 슬기가 있어서 정탐에 능한 자, 눈과

귀가 밝아서 무선전선에 능한 자를 고르는 것이었다. 이 시험을 한 심리학자는 한국

청년이 용기로나 지능으로나 다 우량하여서 장래에 희망이 많다고 결론하였다.

  다음에는 청년 일곱을 뽑아서 한 사람에게 숙마바 하나씩을 주고 수백 길이나 되는

절벽 밑에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 가지고 오라는 시험이었다.

  일곱 청년은 잠깐 모여서 의논하더니 그들의 숙마바를 이어서 하나의 긴 바를

만들어, 한 끝을 바위에 매고 그 줄을 붙들고 일곱이 다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

입에 물고 다시 그 줄에 달려 일곱이 차례차례로 다 올라왔다. 시험관은 이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중국 학생 4백 명을 모아 놓고 시켰건마는 그들이 해결치 못한 문제를 한국

청년 일곱이 훌륭하게 하였소. 참으로 한국사람은 전도 유망한 국민이요."

  일곱 청년이 이 칭찬을 받을 때에 나는 대단히 기뻤다.

  다음에는 폭파술, 사격술, 비밀히 강을 건너가는 재주 같은 것을 시험하여 다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을 보고 나는 만족하여 그날로 두곡으로 돌아왔다.

  이튿날은 중국 친구들을 찾을 생각으로 서안으로 들어갔다. 두곡서 서안은 40리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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