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전: 요약] 퐁니 퐁넛 학살 사건(베트남어: Thảm sát Phong Nhất và Phong Nhị, 영어: 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 성 디엔반 현 퐁니, 퐁넛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에 의해 학살당하여 70여 명이 죽었다. 이 사건은 2000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가 진상조사를 벌이면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게 되었다. 2004년 6월, 대한민국의 시민단체는 성금을 모아 관련 희생자에 대한 추모비를 세웠다.
베트남 전쟁,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퐁니 퐁넛 마을 학살 사건
미라이 학살이 미군에 의해 자행이 되었다면,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은 바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으로 실재로는 더 많은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희생을 당한 베트남 주민들의 넋을 기리며 이 사건을 정리해 본다.
1.사건전 배경
미군을 비롯한 한국군 등 남베트남의 동맹군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분이 모호해지자 일정 구역에 민간인을 몰아놓고 수용하여 전략촌을 만들고, 그 이외의 지역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적으로 간주하는 “자유 사격 지대” 보아 수색 섬멸 작전을 펼쳤다. 작전 중인 미군은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베트콩”이고 어린 아이도 첩자이며, 놓치는 것보다 오인해서 죽이는 게 낫다는 태도를 보였다.
조너선 닐(Jonathan Neal)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 측이 게릴라를 찾지 못하면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것은 전승을 과장하려는 속임수이기 보다는 민간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만두라고 말하도록 압박하는 전략이었고, 이 과정은 미국 정부의 압력아래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속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공식 명령은 없어도 학살 사건이 발생할 이유를 미국 정부가 만들어 준 것이다.
2.학살 사건 발생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 여단은 1968년 1월30일부터 2월29일까지 여단 규모로 ‘괴룡 1호작전’을 벌였다.[10] 이 작전은 1968년 1월30일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구정 대공세에 맞선 것으로 ‘구정공세 반격작전’으로도 불렸다. 1968년 2월12일 오전 11시 무렵 퐁넛 마을을 지나던 청룡 부대 1중대가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의 민간인 70여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베트남 주둔 한국군의 공식 기록인 《파월 한국전사》에 의하면
“1968년 2월 12일 9음력 1월 14일 제1중대(장, 김석현 대위)는 08:15에 1번 도로를 정찰하며 북진하고 퐁넛마을에 진입 (중략) 11:05에 목표(11-이곳은 퐁니촌에 해당한다)를 공격하였는데 이 때 서쪽 지역으로부터 30여발의 적 사격을 받아 4.2인치 박격포로 발사지점을 포격 제압 (중략) 부상자 1명이 생겨 후송하였다.”
3.사건의 진실
그러나, 당시 학살 피해자의 증언과 전투 참여자의 증언, 미군측의 조사 보고서에 의해 드러난 사실은 《파월 한국전사》의 기록과 다르다.
살아남은 마을 주민은 아침식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 한국군이 당산나무 쪽으로 밀고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작전에 참여 하였던 1중대의 1소대장 최영언 씨는 “갑자기 마을로부터 선두 1소대 병력 쪽을 향해 사격이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모든 소대원들이 수풀 바닥에 엎드렸다. 누군가 한명이 총에 맞아 부상 당한 듯했다. 중대장 김석현 대위에게 긴급히 무전을 쳤다. 중대장의 응답은 마을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1소대와 2소대가 방향을 왼쪽으로 틀고 총을 쏘며 마을에 진입했다”고 말하였고, 마을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베트콩은 떠나고 겁먹은 마을 사람들뿐이어서 마을 사람을 한 곳에 모아 놓았는데, 부대 후미의 누군가가 갑자기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고 증언하였다. 2소대장이었던 이상우 역시 “베트콩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 마을 주민들도 저항하거나 그런 움직임도 없었다. 애들이 겁이 나서 도망가니까 죽인 거지 참 …….” 이라고 말하였다.
안전 마을이었던 퐁니 퐁넛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벌어지자,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에 강력히 항의하였고 미군은 독자적인 조사를 벌였다. 주월 미군 사령부 감찰부는 조사결과를 주월 미군 사령관 및 군부 고위 장성에게 보고하였다. 보고서에는 20여 장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A4 용지규격 총 554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감찰부는 이 보고서에서 한국군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잔혹 행위를 저지르고 사람들을 학살하였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는 기밀문서로 분류되어 비공개로 있다가 30년이 지난 후, 2000년 6월1일 비밀이 해제되었다. 미군 감찰부의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은 미 해병 연합 행동소대 Delta-2 소속 본(J. Vaughn) 상병이 촬영한 것이다. 본(J. Vaughn) 상병은 한국군 철수 이후 민간인 부상자 치료를 위해 마을로 들어갔다. 보고서는 퐁니 퐁넛 학살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1968년 2월 12일 사건
장소 : 꽝남 성(Quang Nam) 디엔반(Dien Ban)현 퐁니(Phong Nhi)·퐁넛(Phong Nut) 마을
작전부대 : 한국 해병 2여단 1대대 1중대(일명 괴룡1호 작전)
희생과 손실 : 69명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들이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음. 한국 해병 1명 부상”
학살의 증거 사진을 찍은 본 상병은 조사관인 캠퍼넬리 소령에게 사진과 함께 진술서를 제출하였고, 얼마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1994년 46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한편, 본 상병이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에 나온 16세의 쩐티득은 4년뒤인 1972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가담하였다. 빈디엔 근처의 남베트남군 초소에 부비트랩을 설시하다 발각되어 감옥에 갔으며 1975년 4월 전쟁 후에 풀려났다. 쩐티득은 이후 다낭에서 잡화상을 하다 1999년 8월 유방암에 걸려 47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4. 변명의 여지가 없던 전략촌 학살
인류학자 권현익은 《학살 그 이후》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을 전략촌 이외의 지역에서 노인, 여성, 아동에게 저질러진 학살과 비교적 안정된 기반을 갖고 있던 전략촌에 대해 이루어진 학살로 구분하면서,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 당시 꽝남 성과 꽝응아이 성 지역에서 저지른 학살 가운데 다수가 전략촌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전략촌으로 지역 주민들을 한 곳에 수용하여 그곳을 안전 마을로 지정하고 평소에 미군이나 한국군과 교류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전세가 바뀌거나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길 경우 그곳은 한 순간에 “베트콩 마을”로 낙인 찍힐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여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경우 평소 미군이나 한국군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거나 별다른 경계심을 보이지 않았던 마을 주민들이 큰 희생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5. 사건의 은폐
미국의 퀘이커 구호단체 활동가 다이앤과 마이클 존스는 〈한국군이라 불린 동맹군〉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들은 이 보고서에서 퐁니 퐁넛 학살의 생존자들이 “한국군이 정찰중에 대인 지뢰에 걸렸고, 마을 사람들은 지뢰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총소리는 없었다. 그 뒤 한국군이 마을에 왔고 학살이 일어났다”고 증언한 내용을 실으면서, 이 사건이 베트남 현지는 물론이고 《뉴욕 타임즈》에도 기사가 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근처 작은 절에 있던 비구니는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어요. …… 우리 작은 절 안에는 그들 모두를 위해 향을 피울 공간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감찰부의 보고를 받은 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웨스트 모어랜드는 1968년 4월 29일 파월사령부 사령관 채명신에게 전쟁범죄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채명신은 6월 4일 보낸 답장에서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고 하면서 베트콩의 기만 전술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당시 청룡부대 헌병대 수사계장은 상부로부터 “청룡부대를 가장한 게릴라의 소행”이란 지침에 따라 조사보고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퐁니 퐁넛 마을의 생존자들은 1969년 2월 자신들이 남베트남 정부에 복무하고 있는 군인의 가족이고 합당한 시민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학살을 당하였다며 진실을 밝히고 배상하여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남베트남 하원 의장에게 보내 탄원하였다. 남베트남 정부 역시 미군 사령부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한편, 미군 정치 고문 제임스 맥은 보고서에서 퐁니 퐁넛과 같은 민간인 학살이 무수히 일어나 “한국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증오심이 대단히 심각하다”고 진단하였다. 미국은 한국군이 공산주의자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어 매우 용감하지만, 민간인에 대한 잔혹행위를 일삼고 점령군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어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미국은 이 문제를 쉽게 넘기지 않으려 계속하여 추궁하였지만, 한국은 소대장들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끝내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까지 알고 있었지만 결국 사건을 은폐하였다. 당시 한국의 언론은 이 사건을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6. 지금도 사건을 반성하지 않는 한국
2000년 11월 《한겨레21》은 종전 26년을 맞아 기밀 해제된 문서 속의 희생자를 찾아 나섰다. 사진 속 가슴이 도려내진 여성은 당시 21살이었던 응웬 티 탄이었다. 여동생 응웬 티 호아는 언니가 하룻동안 더 살아 있었고 나즈막히 엄마를 부르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당시를 회상하였다. 다낭에 살던 응웬 티 탄의 가족은 정월 대보름 불공을 드리기 위해 퐁넛 마을을 찾았다 일가족이 모두 희생되고 막내만이 살아남는 참사를 당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사건의 진실을 인정하였는지 궁금해 하였다. 2013년 8월 글로벌포스트와 인터뷰한 대한민국 국방부 대변인은 “한국군이 그러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학살 일체를 부정하였다.
7.마무리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은 많은 대량 학살을 벌였는데, 퐁니・퐁넛 학살 이외에도 하미 마을 학살 사건, 빈호아 학살 등이 알려져 있다.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은 베트남 정치국의 공식 문서에서 약 5천여명, 2000년 《한겨레21》구수정 통신원의 현지 조사에 따른 집계에서는 약 9천명에 이른다.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은 미군의 전략에 따라 안전 마을로 분류된 곳이었고, 미국 해병대 켑소대와 자매 결연을 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퐁니 퐁넛 사람들은 미군이나 한국군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지 않았고, 마을에는 남베트남군의 가족들도 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저지른 학살은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하며 반성을 해야 한다. 한국이 일본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은 반성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범죄에 대한 반성없이 어떻게 국제사회에서 일본만을 비판할 수 있는가. 지금이라고 베트남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범죄에 대해서는 분명한 조사와 반성 그리고 사과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역사 >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조 시대 공덕을 칭송하여 주던 시호(諡號) 설명 (0) | 2015.04.06 |
---|---|
동아시아 왕조 국가 왕(황제)의 사후 붙여지는 묘호 설명 (0) | 2015.04.06 |
동아시아의 왕(황제) 묘호 2탄: 중흥의 뜻을 담은 중종(中宗) (0) | 2015.04.05 |
동아시아의 왕(황제) 묘호 개국 군주 태조(太祖) 국가의 체계를 세조(世祖) 설명 (0) | 2015.03.23 |
베트남 전쟁, 한국군이 저지른 용서받지 못할 범죄 빈호아 학살 (Bình Hòa massacre) (0) | 2015.03.17 |
베트남 전쟁, 미군에 의해 자행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 (0) | 2015.03.17 |
서양사 연표 (20세기 후반: 기원후 1945년 ~ 1994년까지) (0) | 2015.03.08 |
서양사 연표 (20세기: 기원후 1900년 ~ 1945년까지) (0) | 2015.03.08 |
서양사 연표 (19세기: 기원후 1800년 ~ 1899년까지) (0) | 2015.03.08 |
서양사 연표 (기원후 1700년 ~ 1799년까지) (0) | 2015.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