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中宗)은 동아시아 제왕의 묘호 중 하나로, 흔히 국가적 위기에서 나라를 바로 세운 제왕이나 이미 망한 나라를 다시 중흥한 제왕에게 쓰인다. 중종의 묘호를 썼던 왕들을 요약해 본다.
동아시아의 왕(황제) 묘호 2탄: 중흥의 뜻을 담은 중종(中宗)
1. 상나라의 제9대 왕(10대 군주) 태무(太戊)
태무(太戊)는 상나라의 10대 군주로 때어날 때의 이름은 자밀(子密) 또는 자주(子伷)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형인 옹기에 이은 상나라의 9대 군주였다. 현인 이척(伊陟)을 재상으로 해 상나라를 부흥시켰다. 입궐하지 않았던 제후도 이 때에는 입궐하게 되었다고 한다. 75년간 통치하였고 중종(中宗)으로도 불리며 아들인 중정이 뒤를 이었다.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따르면 삼촌인 소갑에 이어 상나라의 7대 군주가 되었고 대무(大戊)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동생인 옹기가 뒤를 이었다고 한다.
2. 전한의 제10대 황제 전한 선제
한 중종 효선황제 유순(漢 中宗 孝宣皇帝 劉詢, 기원전 91년 ~ 기원전 49년 재위 기원전 73~49) 자는 차경(次卿). 본래 휘는 병이(病已)였으나, 피휘의 번거로움을 덜기 위하여 즉위할 때 순(詢)으로 바꾸었다. 전한 무제의 증손자로 여태자 유거(戾太子 劉據)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여태자의 아들인 사황손(史皇孫) 유진(劉進)이다. 어머니는 왕씨(王氏)이다.
어릴 때 민간에서 자랐고, 곽광(霍光)에게 옹립되어 황제로 즉위했다. 선제는 법가 주의적 정치 신조에 준거하여, 감세나 상평창을 설치하고, 국민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중앙과 지방에서 행정을 개혁하고, 범죄 예방을 위해 형벌을 강화하고, 국민의 경제력을 휴양하면서 중앙정부의 권력 강화를 도모하는 내정 중시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무제 이후의 국내의 피폐한 경제를 완화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이것들은 민간에서 성장하여 민중의 실정을 아는 선제만이 가능한 시책이었다. 외교면에서는 오손과 제휴해 서역에 진출, 흉노를 약체화, 분열화해, 기원전 51년에는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를 항복시키는 등, 약체화되고 있던 한왕조의 국력을 부흥시키는 것에 노력했다.
이 외에 내외 정치에 있어서의 성과로부터, 선제는 한나라 중흥의 선조라고 하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중서(中書)를 통한 직접적인 통치는 중서의 역할에 해당한 환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원인이 되어, 원제의 시대에는 환관과 외척이 제휴하여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한 요인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이상주의, 회고주의인 유교를 싫어했다.
3. 동진의 초대 황제 원제
동진 원제(東晉 元帝, 276년 ~ 322년, 재위 317~322) 본명 사마예(司馬睿), 중국 동진의 초대 황제로 자는 경문(景文)이고 하내군 온현(河内郡 温県) 출신이다 봉지가 동쪽인 낭야였기에 낙양 근교에서 벌어진 팔왕의 난과 이민족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서진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건업에 주둔하며 서진 황족과 주변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서진의 마지막 황제인 민제가 끝내 이민족의 칼에 죽자 317년 동진을 세우고 제위에 올랐다.
4. 당나라의 제4대 황제
당 중종 이현(唐中宗 李顯, 656년: 현경(顯慶) 원년 11월 26일 ~ 710년: 경룡(景龍) 4년 7월 3일; 재위 683~684; 705~710) 당의 제4대 황제이며 당 고종 이치의 7남으로 모친은 측천황후 무씨.
이현은 처음엔 주왕에 봉해졌는데, 동복 형들인 이홍과 이현(李賢)이 태자에 올랐으나, 어머니인 무씨의 미움을 받아 모두 폐위당하고, 그 다음인 이현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683년 12월 27일, 아버지가 붕어하자, 7일 뒤인 684년 1월 3일에 황제에 올랐으나, 태후 무씨(측천황후)가 계속 정권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허수아비 황제였다. 이현은 1개월 뒤인, 684년 2월 26일에 결국 폐위당하고 여릉왕으로 지위가 격하되어, 연금당했다.
690년엔 어머니 무씨가 국호를 당에서 주라 바꾸고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15년 뒤인, 705년에 어머니가 신하들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국호를 주에서 당으로 바꾸고 태후로 물러났다. 그리하여, 705년 2월 23일에 다시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이번엔 자신의 부인인 황후 위씨가 정권을 장악하려 했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710년 7월 3일에 결국 위씨와 자신의 7녀인 안락공주에게 독살당했다. 시호는 중종 대화대성대소효황제(中宗 大和大聖大昭孝皇帝)이다
5 조선의 제11대 왕 (중종 반정)
중종(中宗, 1488년 4월 16일 (음력 3월 5일) ~ 1544년 11월 29일 (음력 11월 15일), 재위: 1506년~1544년) 조선의 제11대 왕으로 휘는 역(懌),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 자는 낙천(樂天). 사후 시호는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성종의 차남으로 정현왕후 소생.
1506년 9월 2일부터 1544년 11월 28일까지 재위하는 동안 1506년 9월 2일부터 이듬해 1507년 8월까지 박원종(朴元宗)이 섭정하였고 1507년 8월부터 1543년 3월까지 친정하였으며 1543년 3월부터 이듬해 1544년 11월 28일 왕세자에게 선위(양위)할 때까지 장남 왕세자 이호(훗날 인종)가 대리청정하였고 선위한 다음날인 1544년 11월 29일 붕어했다.
반정으로 집권한 두 번째 군주였다. 그러나 사적인 욕심이나 원한으로 반정을 일으킨 세조 찬위, 인조반정과는 다른 각도에서 평가되나, 전반에는 공신 세력의 전횡에, 후반에는 외척 세력의 전횡에 휘둘렸다. 하지만, 김안로나 조광조의 숙청 때 중종의 모습은 사관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라고 하거나, ' 이때 양연이 대사헌으로 이 의논(김안로의 처벌)을 먼저 주장한 것은 왕의 밀지(密旨)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라고 했듯이 단순히 신권에 의해 휘둘린 왕은 아니었다.
재위 중반에 조광조 등의 사림을 일시에 기용하였으나 공훈삭제와 관련한 공신세력들의 반발과 자신의 왕권의 위협에 대해 우려하여 사림 세력들을 기습적으로 숙청한다. 이 후에는 남곤이 정국을 주도하고, 남곤 사후에는 김안로가 주도하지만, 김안로의 지나친 권력쟁투와 횡포로 인해 위협을 느껴 조광조와 마찬가지로 김안로를 기습적으로 제거한다. 이후에는 외척에게 정사를 맡긴다. 이는 후일 대윤, 소윤간의 정쟁의 원인이 된다. 중종은 정국 주도 능력을 당시 조선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검소하게 생활하였지만, 자식, 종친들이나 신하들의 사치를 막지 못했고, 학풍이 땅에 떨어진 상황을 걱정하면서도 선비들을 죽이는 사화를 주도한 왕이기도 했었다. 중종은 왕조와 자신에게 주어진 왕좌를 신권의 지나친 비대화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만 했었던 임금으로 평가된다.
6.마무리
중종의 묘호는 어려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뜻을 담았는데, 이 묘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왕은 전한 선제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잘못한 점도 있겠지만, 당시 백성들을 위한 정치와 유학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해 현실적인 정치를 행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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