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수에즈 운하 (Suez Canal) 아시아와 한국에 끼친 영향

올드코난 2015. 11. 17. 10:28
반응형

JTBC 오늘의 역사 수에즈 운하: 1869년 11월17일 세계 최대의 운하 수에즈 운하(Suez Canal)가 개통되었습니다. 먼 곳에 있어서 우리가 크게 관심이 갖고 있지 않았지만,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이 곳은 한국에게도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수에즈 운하(Suez Canal)에 대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이야기들들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선 수에즈 운하에 대한 개요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수에즈 운하 개요]

수에즈 운하(아랍어: قناة السويس)는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로 1869년 11월 17일에 공식 개통되었다. 지중해와 홍해 사이를 지날 때 육로로 혹은 아프리카로 우회해서 갈 필요 없이 유럽과 아시아를 해상로로 바로 연결해준다. 운하의 북쪽 종착지는 시나이 반도 서쪽인 포트 사이드이며, 남쪽 끝은 수에즈 인근이다. 이스마일리아가 두 곳 가운데 지점에 있다.


원래 길이는 164km였지만 추가 확장된 현재 수에즈 운하의 길이는 193km(120마일)이다. 가운데에 그레이트 비터 호를 통과하여 수에즈 만과 지중해를 잇는다. 수에즈 운하에는 갑문이 없으며, 바닷물이 양쪽 바다에서 그레이트 비터 호수로 자유로이 흘러들어온다. 수에즈 운하 대신 다른 길로 우회하려면 주로 아프리카의 아굴라스 곶으로 돌아간다. 이 항로는 수에즈 운하로 다닐 수 없을 만큼 큰 선박이 이용하며,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기 전에는 선박들이 우회로인 아굴라스 곶으로 다녔다. 최근 소말리아 해적이 창궐하면서 안전상의 이유로 아굴라스 곶 항로를 이용하기도 한다.


1869년에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 두 대륙을 오가는 상품을 배에서 내려 지중해와 홍해 사이 육로로 운반하기도 했다. 하루에 운하를 지나갈 수 있는 선박 수는 106척이다. 운하는 대표적인 중립지대로서 이집트에서 관리하며 주권 행사에 제약이 있다.

참고:수에즈 운하 설명 => https://en.wikipedia.org/wiki/Suez_Canal


수에즈 운하 상세설명은 위키백과를 참조하고 이제는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수에즈 운하(Suez Canal)에 대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이야기와 한국에 끼친 영향


1. 운하의 시작 네카우 2세(네코 2세)

공식적으로 수에즈 운하는 1869년 11월 17일에 개통되었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는 이미 고대부터 계획이 되었던 난제였다. 수에즈 운하를 최초로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은 고대 이집트 제26왕조 네카우 2세(네코 2세, Necho II; BC 610–595)였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 건설을 최초로 시도해 건설을 시작해 완성 직전까지 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무려 12만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19세기에 만들어진 수에즈 운하와는 달리 나일강 삼각주의 제일 동쪽 끝에 흐르는 한 지류와 홍해를 연결했다. 네카우는 두 척의 배가 동시에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판 운하로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해 양쪽 바다의 함대를 통합 운영하려 했지만, 신탁에서 운하가 완성되면 적들이 유리하게 이용하리라고 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하고 중지되고 만다.



2. 수에즈 운하 처음 완성자 다리우스 1세(Darius I; BCE 550–486)

역사상 수에즈 운하의 건설 작업은 여러 차례 시도됐으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 운하를 완성한다. 운하의 건설로 이집트와 페르시아 간 항해가 용이해졌다.

다이우스의 비문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Saith King Darius: I am a Persian. Setting out from Persia, I conquered Egypt. I ordered this canal dug from the river called the Nile that flows in Egypt, to the sea that begins in Persia. When the canal had been dug as I ordered, ships went from Egypt through this canal to Persia, even as I intended.”


“다리우스 왕이 말하노니, 나는 페리시아다. 페르시아 밖에서 나는 이집트를 정복했다. 나는 페르시아에서 시작해 이집트로 흐르는 강의 운하건설을 명했다. 나의 명대로 운하가 만들어졌고, 내가 원한대로 이 운하를 통해 배가 이집트에서 페르시아까지 가게 되었다.“



3.다리우스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이집트를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2세기 초의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초기 이슬람 시대에도 운하가 재개통됐지만 그때마다 침니(沈泥) 현상이 일어나 물길이 다시 막혔다.


4.프랑스가 완성하고 영국이 차지한 수에즈 운하

오랜 시간이 흘러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한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계획하지만, 시간과 비용 등의 문제로 포기한다. 수에즈 운하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은 프랑스 외교관 레셉스 (1805~ 1894)였다. 연인원 150만명이 투입된 거대 공사로였고 당시 프랑스의 라이벌이었던 대영제국의 방해공작으로 공사는 매우 어렵게 진행이 되었다. 강제 노역으로 수천명이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10년만인 1869년 11월17일 수에즈 운하는 완공이 된다. 하지만 개통된지 13년뒤 영국이 수에즈 원하의 지배권을 얻게 되고 영국은 1875년에 이집트 지분을 취극하고 1882년에는 이집트를 식민지화시켜 버린다.

결국 프랑스가 차려논 밥상에 영국이 숟가락을 얻고 혼자 밥을 먹어 치운 격이 되어 버린 것이다.



5.수에즈 운하가 아시아와 한반도에 끼친 영향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의 패배의 원인 중 하나는 러시아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건널수 없었기때문이었다. 운하의 운영권을 가진 영국의 반대때문으로 결국 러시아의 발탁함대는 아프리카를 우회해 7개월이나 걸려 동아시아로 이동을 하게 되고, 결국 사기가 충천한 일본해군에게 전멸하고 만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조선 식민지화를 가속하게 되고 결국 을사늑약까지 이르게 된다. 만일, 러시아가 일본에 패전을 하지 않았다면 조선 입장에서는 조금이나마 숨고르기를 할 여력은 있었기에 러일전쟁의 일본 승리는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한국 뿐만이 아니다. 이미 운하 건설전부터 서구열강들의 아시아 침략은 계속되어 왔지만, 수에즈 운하의 건설로 항로가 짧아지면서 운송기간이 대폭 줄어들게 된다. 이는 아시아의 자원들이 유럽으로 가져가는 양들이 훨씬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에즈 운하는 아시아에게는 아픔과 치욕을 안겨준 존재였던 것이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글에 공감하신다면 SNS (트위터, 페이스북)로 널리 널리 알려 주세요. ★ 글의 오타, 하고픈 말, 그리고 동영상 등이 재생이 안되는 등 문제가 발견 되면 본문 하단에 댓글로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