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청교도 혁명 설명 (1642~51)

올드코난 2015. 12. 1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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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혁명은 영국에서 의회세력과 군주정세력 간에 발생한 싸움(1642~51)이다.

스코틀랜드와 벌인 주교전쟁(1639, 1640)에 의해 내란이 촉발되었는데 찰스 1세는 주교전쟁을 치르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640년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찰스 1세 진영과 하원 사이의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다. 찰스 1세는 1642년 1월 4일 5명의 하원의원들을 체포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1월 10일 런던을 떠났고 양측 모두는 전쟁을 준비했다. 애초에 양 진영의 병력 규모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각기 약 1만 3,000명 정도). 1645년 의회파가 신형군을 창설할 때까지는 왕당파가 기병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의회파가 재력면에서 왕당파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싸움의 최종 결과를 예상할 수 있게 했다. 왕당파 지지세력은 주로 웨일스와 북부 및 서부 잉글랜드에 분포되어 있었던 반면, 의회파는 좀더 부유한 남부와 동부 지역에서 강세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또한 런던과 대다수의 항구 및 해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의회는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던 반면 찰스 1세는 현금 마련을 위해 지지세력들의 너그러운 인심에 의존하고 있었다.

 

1642~46년은 전쟁의 초기국면이었다. 찰스 1세가 1642년 8월 노팅엄에서 기치를 내건 후, 여러 차례의 접전으로도 결정적인 승부가 나지 않았다. 1642년 10월 23일 찰스 1세는 에지힐에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으나 턴엄그린에서 의회군과 마주치자 런던으로의 진군을 포기했다. 그후 옥스퍼드로 철수했는데 이곳이 찰스 1세의 지휘본부가 되었다. 1643년 6월 30일 애브월턴무어 전투에서 승리한 왕당파는 거의 요크셔 전역을 장악했으며 의회파는 10월 11일 윈스비 전투에서 승리해 링컨을 차지했다. 남서부지역에서 왕당파는 랜스다운 전투와 브로드웨이다운 전투(7월)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찰스 1세의 조카인 루퍼트 공은 브리스틀을 손에 넣었다. 그해 9월 제1차 뉴베리 전투에서 승부가 나지 않자 양 진영은 동맹세력을 찾아나섰는데 의회파는 엄숙동맹을 통해 스코틀랜드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확보했으며 찰스 1세는 아일랜드측과 강화를 맺음으로써(아일랜드에서는 1641년 이래 반란이 계속되었음) 아일랜드에 파견되었던 병력을 브리튼 섬으로 배치해 의회파와의 전투에 주력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마스턴무어 전투(7월 2일)에서 거둔 의회파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1644년에는 전반적으로 왕당파의 군사작전이 좀더 성공적이었다. 9월 20일 제2차 뉴베리 전투에서는 승부가 판가름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645년 의회파 진영에서 신형군을 창설하고 6월 14일 네이즈비 전투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전세가 결정적으로 뒤집혔다. 마지막으로 남은 왕당파 병력은 7월 10일 랭포트에서 분쇄되었으며 스코틀랜드에서는 9월 13일 몬트로즈 후작이 필러포 전투에서 패퇴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지역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의회군은 남서부 일대를 평정했다. 1646년 왕당파 병력은 최종적으로 해체되면서 옥스퍼드에서 항복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군대에 보호를 요청하며 피신했으나 스코틀랜드측은 1647년 1월 잉글랜드를 떠나면서 찰스 1세를 의회파 진영에 포로로 넘겨주었다.

 

1647년 찰스 1세는 갈수록 의회측과 불화를 빚어오던 군대에 의해 납치된 후 탈출했으나 불운하게도 와이트 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12월 26일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비밀 단체(Engagement)측과 협상을 갖고 자신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잉글랜드에서 장로파 제도를 확립하고 독립파의 활동을 억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로 인해 왕당파의 몇 차례 반란과 1648년 7월 스코틀랜드의 침공 등 내란의 2번째 국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기도는 분쇄되었으며 찰스 1세의 이중성에 대해 분개하는 여론이 비등함에 따라 결국 찰스 1세는 재판을 받고 1649년 1월 처형당했다. 다음으로 아일랜드에서 전투가 발생했다. 올리버 크롬웰은 새로이 확립된 공화정 체제를 위해 아일랜드에서 가톨릭과 왕당파의 봉기를 진압(1649~50)했다. 몬트로즈 후작이 주도한 스코틀랜드 반란은 1650년 4월 분쇄되었으며 찰스 2세는 장로교 서약파들과 타협을 보았다. 그해 9월 3일 크롬웰은 던바 전투에서 이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 승리를 끝까지 마무리짓지는 못했으며 따라서 당시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른 찰스 2세로 하여금 잉글랜드 지역으로 깊숙이 진격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당파는 1651년 9월 3일 우스터에서 완전히 패배했고 찰스 2세가 국외로 탈출함으로써 사실상 그동안의 내란이 끝났다.

 

내란의 과정에서 인명이나 재산상의 피해는 비교적 경미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내란은 공화정(Commonwealth)과 호국경 체제(Protectorate)를 만들어냈으며 종교적인 면에서는 잉글랜드 내에서 비국교도의 전통을 성장시켰다. 또한 내란은 영국 국민들에게 상비군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감을 자리잡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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