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프랑스 혁명 요약

올드코난 2015. 12. 18.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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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99년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대혁명에 대해 정리해 본다.

1789년에 첫번째 절정에 이르렀는데 흔히 쓰이는 '1789년 혁명'이라는 말은 프랑스에서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종말을 일컬으며 후에 일어난 1830, 1848년의 혁명과 구별해 쓰이기도 한다.


이 혁명의 동기에 대해 역사가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들 수 있다. ①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으며 이 인구를 충분히 먹여살릴 수 없었다. ② 세력을 넓히고 있던 부유한 부르주아지는 다른 어느 국가에서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제도적으로 정치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③ 농민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시대착오적이고 짐스러운 봉건제도를 지지하는 경향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④ 사회적·정치적 개혁을 주창하는 철학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프랑스에서 더욱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⑤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에 참여한 결과 국가의 재정은 완전히 파탄에 이르렀다.


귀족 반란(1787~89)

1787년 2월 재무장관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이 ' 명사회'(名士會 : 고위 성직자, 대귀족, 소수의 부르주아지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를 소집해 재정 결손을 메우기 위해 특권층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늘린다는 안을 제시했던 때부터 반란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 의회는 칼론이 내세운 개혁안을 거부하고 대신 1614년 이래 소집된 일이 없는 성직자, 귀족, 제3신분으로 이루어진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칼론의 후계자들이 개혁을 강행하려고 하자 '귀족체'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고등법원인 파를망의 저항이 거셌으나 1788년 5월의 칙령으로 고등법원의 세력은 축소되었다. 1788년 봄과 여름에 걸쳐 파리·그르노블·디종·툴루즈·포·렌 등지에서 소요가 있었다. 국왕 루이 16세는 이에 굴복하고 자크 네케르를 내각으로 불러들였다. 네케르는 1789년 5월 5일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그는 실제로 언론자유를 허용해 프랑스는 국가재건을 위한 각종 구상을 담은 소책자들로 넘치게 되었다. 1789년 1~4월 사이에 실시된 삼부회 선거는 1788년 형편없는 추수로 인해 더욱 커진 소요와 때를 같이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투표에서 어떤 계층도 배제당하지 않았다.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불만과 희망 사항을 담은 청원서를 작성했다. 삼부회에 선출된 대의원들은 제3신분 600명과 귀족 대표 300명 및 성직자 대표 300명이었다.


1789년의 사건들

삼부회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 소집되었다. 이들은 근본적인 문제를 둘러싸고 곧 분열되었다. 머릿수에 따른 표결 방법을 쓸 것인가, 신분별 표결 방법을 쓸 것인가에 대해, 전자로 결정하면 제3신분이 유리하고 후자로 결정하면 두 특권 계층이 제3신분을 누르게 되어 있었다. 이 법률적 문제를 둘러싼 치열한 싸움에서 제3신분의 대의원들은 국왕이 호의를 보이는 귀족계층에 반감을 가진 성직자층의 지지를 곧 얻어냈다. 제3신분은 6월 20일 왕을 무시하고 테니스 코트에서 회합을 갖고 프랑스에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흩어지지 않기로 서약하는 개가를 올렸다 . 왕은 마지못해 굴복하고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제3신분과 합류해 헌법제정 국민의회를 구성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를 해산할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지속적인 식량부족문제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2개월을 얼버무리며 속이려 들었다는 사실은 각 도시와 지방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왕과 특권계층이 제3신분회를 뒤엎기 위해 '귀족 음모'가 꾸며졌다는 무성한 소문은 1789년 7월의 대공포(Grande Peur)를 초래했고 농민들은 공포에 질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파리 주변에 군대가 배치되고 네케르가 해임당하자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1789년 7월 14일 군중들은 왕의 폭정을 상징하는 바스티유를 점거했다. 이 사건은 이미 폭동이 아니라 혁명이었다. 국왕은 다시 한번 굴복해야 했다. 파리를 방문한 그는 삼색 모표를 달고 나서서 국민주권을 승인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7월의 대공포 시기에 지방에서는 농민들이 지주에 맞서 봉기했다. 이제는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공포에 질렸다. 국민의회는 농민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하나뿐임을 깨달았고 1789년 8월 4일 밤 봉건적 체제와 1/10세를 폐지한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그다음에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8. 26)을 채택해 자유, 평등, 사유재산의 불가침성, 압제에 저항할 권리 등을 천명했다. 8월 4일의 법령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등이 매우 혁신적이어서 국왕은 승인을 거부했다. 파리의 군중들은 다시 들고 일어나 10월 5일 베르사유로 행진했다. 다음날 군중들은 왕의 가족을 파리로 데리고왔다. 헌법제정 국민의회는 궁정 신하들을 따라 새로 입성해 파리에서 새로운 헌법 마련을 위한 작업을 했다.


새로운 체제

헌법제정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완수하고 구질서를 철폐했다. 시민적 평등(식민지에서는 노예제가 지속되었으므로 프랑스 국내에 한함)을 이룩했으며, 공직과 관련해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권리의 평등을 확립했다. 공채를 청산하기 위해 교회 소유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킨 결정으로 광범위한 부(富)의 재분배가 이루어졌다. 부르주아들과 자영농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큰 이득을 보았으나 몇몇 농업노동자들도 토지를 살 수 있었다. 교회의 수입원을 박탈한 국민의회는 다음 조치로 성직자 민사 기본법을 제정함으로써 교회를 개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교황과 프랑스 내 성직자 대다수는 이 법을 거부했다. 이로써 분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논쟁과 함께 폭력을 부채질했다. 앙시앵 레짐의 복잡한 행정체계는 헌법제정 국민의회에 의해 일소되었고 그 대신 프랑스를 주·군·구·코뮌으로 나누어 선거로 구성한 의회가 다스리도록 한 합리적인 체제를 구축했다. 법 집행의 기초를 이루는 원칙 또한 근본적으로 바뀌었으며 이 체계가 새로운 행정구역에 도입되었다. 법관은 선거로 임명되었다. 헌법제정 국민의회는 국왕과 의회가 입법권과 행정권을 공유하는 입헌군주정 체제를 설립하려 했다. 만약 국왕이 새로운 권위를 가지고 통치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면 이 입헌군주제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나약하고 우유부단했으며, 귀족주의자나 고문관들에게 꼼짝 못 하는 포로에 불과했다. 1791년 6월 20~21일 그는 프랑스를 탈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바렌에서 저지당하고 파리로 송환되었다.


프랑스와 유럽의 혁명과 반혁명

프랑스에서의 일련의 사건은 수년 전에 패배를 겪었던 네덜란드 연합왕국, 벨기에, 스위스 등지의 혁명가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다. 또한 영국, 아일랜드, 독일, 합스부르크 제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변화를 원하던 모든 이들이 혁명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 모든 국가에서 혁명주의자 클럽이 조직되었다. 프랑스의 많은 반혁명주의자들, 즉 귀족, 사제, 몇몇 부르주아들은 국내에서의 싸움을 포기하고 망명했다. 이들 ' 망명귀족'(émigré) 중 다수는 프랑스 북동쪽 국경 근처에서 군대를 소집하고 유럽 군주들로부터의 지원을 모색했다. 유럽의 군주들은 처음에는 혁명에 무관심했으나 프랑스의 국민의회가 국제법의 혁명적 원칙, 즉 각 국민은 자결권을 가진다는 원칙을 천명하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비뇽 교황령은 이러한 원칙에 따라 1791년 9월 13일 프랑스로 재통합되었다. 프랑스와 여타 유럽 국가들의 골은 깊어만 갔다. 외국에서 혁명을 지지하는 자들을 통칭해 자코뱅주의자라고 불렀는데, 이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1792년 4월 20일 마침내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 국왕 처형, 공포정치

혁명전쟁의 첫번째 국면(1792. 4~9)에서 프랑스는 패배를 거듭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국경을 넘어 빠른 속도로 파리를 향해 진격해왔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국왕과 귀족들이 자신을 배반했다고 믿고 1792년 8월 10일 국왕이 거처하던 튈르리 궁전을 점거하고 국왕 가족을 이 궁전에 감금시켰다. 9월 초순 파리 군중은 감옥들을 습격해 투옥되어 있던 귀족과 사제들을 학살했다. 한편 혁명이 민족주의를 일깨움에 따라 의용군들이 끊임없이 군대로 몰려들었다. 프랑스군은 마지막 힘을 다해 1792년 9월 20일 발미에서 프로이센군을 저지했다. 같은 날 새로운 의회인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이튿날 국민공회는 왕정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선언했다. 전쟁의 2번째 국면(1792. 9~1793. 4)에서 혁명군은 적군을 무찔렀다. 프랑스군은 벨기에, 라인란트, 사보이, 니스 주를 점령하여 이곳의 봉건제도를 폐지했다. 국내에서는 국민공회 내에 파벌이 형성되어 프랑스에 부르주아 공화국을 건설하고 전유럽으로 혁명을 확산시키기를 바라는 지롱드당과 하층계급에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더 많이 부여하되 혁명활동을 프랑스 국내에만 국한시키려는 로베스피에르의 산악당(Montagnards)으로 분열되었다. 지롱드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는 국민공회의 재판을 받고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3년 1월 21일 처형당했다.

 

1793년 봄, 혁명전쟁은 3번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프랑스군은 다시 패배를 거듭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영국은 동맹(나중에 제1차 동맹으로 불리게 됨)을 형성했고 이 동맹에 거의 모든 유럽 군주들이 가담했다. 프랑스는 벨기에에 이어 라인란트를 넘겨주었으며 침략군은 파리를 위협했다. 이같은 전세의 역전은 1792년에 그랬듯이 극단주의자들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롱드당 지도자들은 국민공회에서 추방당했고 상퀼로트(노동자·수공업자·소상인·소자작농·농업노동자 등)들이 지지하는 산악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 9일(1794. 7. 27) 반동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산악당은 지롱드당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이었으나 이들은 상퀼로트들의 압력을 받았고, 또한 적군에 대한 방어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과격하고 진보적인 경제·사회 정책을 채택했다. 이들은 최고가격제(정부가 상한가를 제한하는 것)를 도입하고 부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했으며, 가난하거나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국가 보조금을 지급했고, 교육은 자유롭고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망명귀족들의 재산을 징발하고 매각했다. 이같은 특별 조치는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방데 반혁명반란, 노르망디·프로방스에서 일어난 '연방주의자'들의 봉기, 리옹과 보르도의 반란, 브르타뉴에서 일어난 올빼미당(Chouans)의 폭동 등 일련의 반혁명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저항은 공포정치로 분쇄되었다. 공포정치는 적어도 30만 명의 용의자를 체포했고 이 가운데 1만 7,000명이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당했으며 더욱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죽거나 재판도 받지 못하고 살해당했다. 동시에 혁명 정부는 100만 명 이상의 남자를 징집했다.

 

보충된 군대 덕분에 혁명전쟁은 1794년 봄부터 그 4번째 국면에 접어들었다. 플뢰뤼스에서 오스트리아군에 대해 거둔 혁혁한 승리(1794. 6. 26)에 힘입어 프랑스군은 벨기에를 탈환했다. 승리로 공포정치와 경제적·사회적 제재는 무의미해 보였다. 각종 제재를 주관했던 '청렴한 자' 로베스피에르는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 9일에 국민공회에서 타도되었고 다음날 처형당했다. 그의 몰락에 뒤이어 곧 최고가격제가 폐지되었고 서부와 남동부 지방에서는 왕당파의 ' 백색 테러'가 자행되었다. 왕당파는 파리를 장악하려고도 했으나 이들은 혁명력 4년 방데미에르 13일(1795. 10. 5) 청년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격멸당했다. 며칠 뒤 국민공회는 해산했다.

 

총재정부와 혁명의 확산 

국민공회에서 가결된 혁명력 3년 헌법은 5명의 총재들이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회로 이루어진 양원(입법원이라고도 함)에서 입법권을 갖는 것으로 규정했다. 부르주아 공화정인 총재정부 체제는 전쟁을 통해 유럽 전역에 걸쳐 혁명주의자와 반혁명주의자 간의 투쟁이 지속되지 않았다면 평탄하게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총재정부와 입법부 사이에 존재하던 적대관계를 더욱 악화시켰고 종종 새로운 적대감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쟁은 혁명력 5년 프뤽티도르 18일(1797. 9. 4)의 쿠데타와 혁명력 8년 브뤼메르 18일(1799. 11. 9)의 쿠데타로 종결되었다. 첫번째 쿠데타는 총재정부와 의회에서 왕당파를 제거했고 2번째 쿠데타는 총재정부 자체를 폐지했다. 플뢰뤼스에서 승리를 거둔 프랑스군의 유럽 진격은 계속되었다. 라인란트와 홀란드가 점령되었고 1795년에는 홀란드·토스카나·프로이센·스페인이 평화협상을 벌였다. 1796년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로 진입하자 사르데냐는 곧 굴복했다. 오스트리아는 마지막으로 항복한 나라였다(1797, 캄모포르미오 조약). 프랑스가 점령한 국가들 대부분이 '자매 공화국'으로서 프랑스를 모방한 제도를 갖게 되었다.


유럽 대륙에 찾아온 평화는 혁명의 확산을 종결짓지 못했다. 대부분의 총재는 혁명을 유럽으로 확산시키려 했던 지롱드당의 염원을 물려받아 외국 자코뱅주의자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1798, 1799년 프랑스군은 스위스·교황령·나폴리로 진격해 각각 헬베티아·로마·파르테노페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영국은 여전히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영국 상륙을 기대할 수 없었던 총재정부는 보나파르트의 요구에 따라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써 인도의 영국 정부를 위협하기로 결정했다. 보나파르트가 지휘하는 원정군은 몰타에 이어 이집트를 손쉽게 점령했으나 원정군을 호위하던 함대가 1798년 8월 1일 아부키르 만에서 호레이쇼 넬슨의 함대에게 격멸당했다. 혁명의 진전에 불안해하던 열강은 프랑스군의 참패에 용기를 얻어 제2차 동맹을 결성했다. 오스트리아·러시아·투르크·영국이 참여한 이 동맹은 1799년 봄과 여름에 걸쳐 대승을 거두었고 프랑스군을 국경으로까지 후퇴시켰다. 그후 프랑스로 돌아온 보나파르트는 군사적 패배로 실추된 정부의 평판과 자신의 커다란 명성을 이용해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전복하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비록 보나파르트는 혁명이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바로 자신이 새로운 형태의 혁명을 전세계에 전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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