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영국 입헌군주제의 출발점 명예 혁명 요약

올드코난 2015. 12. 1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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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혁명은 1688~89년 영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 제임스 2세가 퇴위하고 그의 딸 메리 2세와 네덜란드의 스테드호우데르(총독)이며 오라녜 공인 메리의 부군 윌리엄 3세(오라녜 공 빌렘)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제임스 2세는 1685년 왕위에 오른 후 노골적인 가톨릭 편중 정책을 펴 영국인들의 인기를 상실했다. 1687년 신앙자유령(Declaration of Indulgence)을 공포하여 비국교도에 대한 법적 제재를 금지했으며, 1688년 4월에는 제2차 신앙자유령을 모든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2주 연속 이 선언을 낭독하도록 명령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샌크로프트와 다른 6명의 주교들은 제임스 2세에게 이같은 조치에 반대하는 청원을 제출했으나 이들은 모두 선동 비방죄로 기소당했다. 그들은 1688년 6월 제임스 2세의 가톨릭교도 왕비 모데나의 메리가 아들을 낳는 것과 거의 동시에 석방되었다. 제임스 2세에게 상속자가 탄생한 사건은 그의 가톨릭 정책이 무한정 계속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국민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토리당의 던비 백작과 헨리 컴프턴 런던 주교를 포함한 7명의 저명인사들이 오라녜 공 빌렘에게 편지를 써보내 군대를 이끌고 와서 국내문제를 바로잡아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빌렘의 주된 관심사는 유럽에서 프랑스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영국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 내의 불만세력 지도자들과 1년 넘게 긴밀한 접촉을 유지해오고 있던 빌렘은 그들의 제의를 수락했다. 11월 5일 토베이에 상륙한 빌렘은 천천히 런던으로 나아갔으며 제임스 2세의 지지자들은 그로부터 이탈해 나갔다. 제임스 2세의 딸 앤과 그의 유능한 장군 존 처칠도 그를 저버리고 빌렘의 진영으로 들어가자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달아났다.

 

이제 빌렘은 정부를 운영하고 의회를 소집하도록 요청받았다. 1689년 1월 22일 컨벤션 의회가 소집되었으며 토론을 거친 후 제임스 2세의 국외탈출을 왕위 포기로 간주하고 권리선언에 따라 왕위를 윌리엄과 메리에게 공동으로 이양한다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다. 왕위계승이라는 선물과 그에 따른 조건이 동시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후 컨벤션 의회는 진정한 의회로 변모했으며 권리선언은 내용이 보완되어 권리장전으로 바뀌었다. 권리장전은 윌리엄과 메리 사이에 후손이 없을 경우 메리의 여동생 앤에게 왕위가 계승되도록 규정했으며, 가톨릭교도에게는 왕위계승을 봉쇄했다. 또한 국왕의 법률효력 정지권한을 폐지했으며, '여태껏 시행되어온' 법률에 구애받지 않는 국왕의 특권을 폐지하고, 평화시 상비군 유지를 불법화하는 동시에 의회의 빈번한 소집과 자유선거의 보장을 선언했다. 이같은 조치들은 휘그당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승리였다. 가톨릭교도가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은 어느 국왕도 그 권한이 무제한적일 수 없음을 의미했다. 가톨릭교도에 대한 왕위계승권 배제 결정은, 정부는 본질적으로 국왕과 의회로 대표되는 국민 사이의 사회적 계약이라고 하는 존 로크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이 되었다.


명예혁명은 영국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왕권과 의회의 갈등에 중요한 이정표가 마련된 사건이었다.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제임스 2세의 퇴위와 1689년 권리장전으로 인해 더 이상 군주의 절대적 권리에 대한 주장이 힘을 얻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와 영국은 전제군주제와 결별하게 되었고 입헌군주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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