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이 한국사회에 주는 교훈

올드코난 2015. 12. 2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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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2월 22일 프랑스 육군 소령이며 유대계 프랑스인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죄목은 반역죄였다. 일명 드레퓌스 사건(프랑스어: L'affaire Dreyfus)으로 이 사건이 프랑스는 물론 세계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특히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 사건이 왜 중요한지 대략적으로 설명해 본다.

프랑스를 변화시킨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이 한국사회에 주는 교훈


1.유죄판결

프랑스 육군 포병 대위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년 10월 9일 - 1935년 7월 12일)는 1894년 12월22일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과 군적 박탈식을 선고 받았다. 드레퓌스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외쳤지만 강제로 불명예 전역된 뒤,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Île du Diable)으로 유배당한다. 문제는 이때 프랑스 군부는 진범을 알고도 재판을 감행한데 있다. 진짜 간첩은 소령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Ferdinand Walsin Esterhazy)이었다.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몬 증거는 정보 유출에 사용된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가 드레퓌스 첫글자와 일치한다는 이유가 다였다.


2.이유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유대인이었다. 당시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의 편견은 여전했는데, 특히 반유대적인 가톨릭교회가 당시 프랑스 정치에 직접 관여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당시 프랑스 육군의 고위 장교들이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덮으려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망신을 당할까봐 드레퓌스를 희생시키려한 것이다.


3. 진실 은폐

그로부터 2년 뒤, 조르쥬 피카르 중령이 우연히 진짜 간첩 페르디낭 에스테라지를 적발한다. 피카르 소령은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일하면서 또다른 간첩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레퓌스는 무죄이며, 진범은 에스테라지라는 것을 알게 되고 참모본부 상부에 이 사실을 알리며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진범 페르디낭 에스테라지은 무죄로 풀려나고 오히려 피카르는 군사기밀 누설죄로 체포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한다. 이후 어느 한 신문에 의해 드레퓌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4.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1898년 1월 13일 작가 에밀 졸라는 문학 신문 로로르(L'Aurore, 여명)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펠릭스 포르(Félix Faure)에게 보내는 유명한 공개 편지를 기고해 사건을 폭로한다. 역사학자 바브라 투흐만은 이를 한마디로 '역사상 위대한 소동'의 하나라고 말하고, 이로 인해 프랑스는 물론 유럽 국가에 이 사건에 대해 알려지게 된다. 이후 에밀은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 중에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1899년에 귀국한다. 이 밖에도 여러 지식인과 신문사 르 피가로 등이 에스테라지가 범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대부분 보수 언론들은 군부의 입장을 두둔한다.


5.시오니즘의 시작

드레퓌스가 악마섬에서 유배되어 있는 동안 프랑스에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반(反)드레퓌스파로 양분된다. 이런 와중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약속했다는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겠다는 시오니즘운동을 시작한다.


6.밝혀진 진실

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프랑스 군부와 정부에 대해 비판하고 세계 언론과 외교적인 부담이 가중되던 중인 1898년 8월 진범 에스테라지와 함께 문서를 조작한 앙리 중령이 감방에서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을 하고 드레퓌스는 재심을 받았다. 군사법원에서는 10년형으로 형량만 감했지만 유죄판결을 유지했다. 선고 후 대통령 사면으로 풀려났지만 복권은 되지 않았다. 이후로도 지식인들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1904년에 다시 재심이 청구되었고 1906년에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무죄가 선고되어 모든 혐의를 벗고, 복권 되어 육군에 복직했다. 이후 소령으로 승진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고 중령으로 예편해 1935년 세상을 떠났다.



7. 사건의 영향

드레퓌스 사건은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무엇보다 당시 프랑스 사회를 보수적으로 몰고 갔던 카톨릭과 정치를 분리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드레퓌스가 재심을 받던 중인 1905년 정교분리법 ‘국가와 종교 분리에 대한 법(불어:loi de separation des Eglises et de l'Etat, 영어:1905 French law on the Separation of the Churches and the State)’이 통과됐다. 이 법은 당시 수상인 콩브(Combe)의 이름을 따서 이른바 “Loi Combe” 즉 콩브법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법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다는 정교분리원칙으로 교회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를 의미하는 ‘라이시떼’(laïcité:비종교성)를 확립하게 된다. 이 법에 따라 프랑스 공화국에서는 어떠한 종교도 공식 종교로 인정하지 않으며, 어떠한 종교에도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고, 종교 건물은 공공 재산으로 환원하고, 종교는 어떠한 정지적 권한도 행사할 수 없음을 규정했다. 이 법이 통과될 당시 교황인 비오 10세는 강하게 비난을 하고, 이후 수 년 동안 프랑스와 가톨릭교회의 관계는 악화되었지만 프랑스 사회가 민주적으로 발전을 하게되었다는 점을 높이 사야 할 것이다.



8. 올드코난이 생각하는 한국사회에 대한 교훈

드레퓌스 사건은 국가를 위해서라는 미명으로 공권력 의해 무고한 사람이 인권유린을 당한 사건이었다. 당시 군부가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를 범인으로 몬 이유는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그리고 유태인에 대한 편견이었다. 

무엇보다 군부는 자신들의 실수를 솔직히 밝히는게 두려웠다. 진실을 밝힌다고 해서 이들에게 엄청난 대가가 따르는 것도 아니다. 사건 초기 재판중이라고 솔직히 실수를 인정했더라면 약간의 비판은 받았겠지만, 더 이상의 책임 추궁이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한가지 더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보수화는 관료화가 된다는 점이다. 관료는 곧 귀차니즘으로 대변한다.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던 것은 그냥 덮어 두자는 괜히 귀찮게 떠들 필요 없다는 이런 관료주의의 폐단 또한 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태도는 결국은 사회를 경직되게 만들고 전체주의 혹은 독재국가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흔히 독재 국가는 스탈린, 히틀러, 김일성 같은 독재자들만의 국가로 알고 있지만, 유럽사회에서의 중세 암흑기의 원인은 종교 문제였고, 카톨릭이라는 종교가 정치에 직접관여를 했기때문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는 1905년에서야 정교가 분리된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이 한국사회에 대한 몇가지 충고를 정리해 보자면.


첫째, 한국의 기독교가 부패를 한 점도 문제지만 이명박 정부 이후 지나치게 정치에 관여를 하고 있다. 특히 극우적이고 과격하게 변질한 점을 경계해야 한다.


둘째, 지나치게 보수적이 되고 있다. 건강한 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균형감을 유지해야 한다. 어느 한쪽에 쏠려서는 안된다. 한국은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가고 있고, 결국에는 우경화가 된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셋째, 관료주의를 꼽을 수 있다. 관료들이 특징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켜서 했다 혹은 몰랐다는 것이 이들의 태도다. 특히 이들은 지시를 받는 일만 한다. 역시 책임을 지는게 싫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이렇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서, 상관이 시켜서.. 한국사회의 관료화는 심각할 지경이다.


넷째,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 드레퓌스 사건은 대표적인 인권 침해 사건이다. 

최근 한국사회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얼마전 유오성 간첩조작 사건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과 국정원이 이 사건을 조작했음이 드러났다. 근데 드레퓌스 사건은 120년전에 발생했다. 120년전에 프랑스에 일어났던 사건이 한국에서 발생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9.마무리

드레퓌스 사건 이후 프랑스는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물론 그 이후로도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국민들을 자각시켰다는 점이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면 결국은 선량한 시민들이 고통을 받게 된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는게 아닌지 생각해 보기를 바라며 이만 줄인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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