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대화재(Great Fire of Rome)는 64년 7월 18일과 19일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사건으로 18일 밤 기름 창고에서 우연히 일어난 작은 화재가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지며 시내에 번지면서 대화재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화재가 컸던 것은 당시 로마는 고대 최고의 도시답게 많은 인구와 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섰던 반면, 소방 시설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예측하지 못해 시민들이 당황을 했고, 초기 진압에 실패하면서 로마 시내 14개 구역 중 10개 구역에 화재가 발생하게 된다.
[참고 그림] Henryk Siemiradzki (1843–1902)의 1876년 작품 Nero's Torches (Christian Candlesticks)
당시 로마 제국 황제였던 네로는 화재 소식을 듣고는 휴가를 중단하고, 로마에 와서 이재민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등 참사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재앙에 시민의 민심은 진정되지 않았고, 심지어 네로 황제의 방화설까지 나돌았다. 그러자 네로 황제와 집권 세력은 이에 대한 민심 수습책으로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우고 기독교도를 대학살하였다. 대화재 이후 다시 재건된 로마 시내는 도로를 정비하고 화재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수로를 늘렸다.
대화재 당시 불타는 로마 시내를 보면서 네로가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사악한 미신, 로마 제국에 의해 처형된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공격을 받고 있었던 기독교도들을 사회혼란 해결의 희생양으로 삼아 화형으로 대학살한 것은 사실이며 이후 네로가 최초의 기독교 박해자이자 폭군 또는 정신이상자로 역사에 낙인찍힌 원인이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 네로 황제를 기독교인들이 증오하는 것은 당연한다.
그리고 네로황제는 문화에 대한 관심은 높았지만, 정치를 잘한 황제는 황제는 아니었다. 결국에는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이라는 선고를 받아 68년 6월 8일 로마를 탈출하여 마지막까지 그의 편에 있던 해방 노예 파온의 별장에서 자살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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