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르완다 대학살 사건 (르완다 집단살해 Genocide in Rwanda:) 설명, 제노사이드(genocide) 대표적 사례

올드코난 2017. 8. 2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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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JTBC차아나는클라스 ‘화두가되는 세계시민교육’편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학살이 자행되었던 르완다 대학살 사건이 거론되었었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 중요한 점 몇가지를 정리해 본다.


1. 집단학살 정의

제노사이드(genocide)는 집단살해(集團殺害)을 뜻하는 말로 그리스어로 민족, 종족, 인종을 뜻하는 Geno와 살인을 뜻하는 Cide를 합친 말이다. 고의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범죄를 일컫는다. 법적으로 제노사이드를 처음 정의한 것은 1948년 유엔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이다.


2. 르완다 대학살이란

르완다 대학살 (르완다 집단살해 Genocide in Rwanda)이란 1994년 르완다에서 르완다 내전중에 벌어진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과 후투족 중도파들이 자행한 집단살해로 4월 6일부터 7월 중순까지 약 100여일간 최소 50만명에서 100만명 이상이 살해당했다. 당시 투치족의 약 70% 전체 르완다 인구의 약 20%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명 살살이었다. 르완다 정부는 1,174,000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시산으로 환산하면 하루에 1만 명, 1시간당 400명, 1분당 7명이 살해당한 것이다. 이 학살을 자행한 것은 자들은 정치 엘리트집단과 카톨릭 교도였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들과 수녀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르완다 정부 역시 희생자 대부분이 도피했던 가톨릭 교회에서 숨졌다고 밝혔다.


3.르완다 내전

집단살해 배경에는 르완다 내전이 있었다. 1990년 후투족 정부와 후투족의 폭력으로 인해 우간다로 피신해야 했던 투치족 난민들로 구성된 르완다 애국전선의 충돌로 발생한 르완다 내전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1993년 잠시 휴전이 이뤄지고 아루샤 합의로 후투족과 애국전선 공동 정부가 탄생하는데 문제는 아루샤 합의가 보수적인 후투족들에게 투치족의 요구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크게 반발하는데 애국전선이 투치족 왕국을 부활시키고 후투족을 노예로 삼는 것을 노리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중요한 것은 르완다 내전으로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증오과 불신이 남아있어 결국 집단학살로 이어졌던 것이다.


4. 대학살의 주체

Akazu라고 알려진 정치 엘리트 집단이 계획하고 실행했는데 이들 다수는 당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자들로 군 간부, 국가 경찰, 그리고 정부의 지원을 받는 무장 조직이었던 Interahamwe과 Impuzamugambi 그 외 후투족 사람들이었다. 학살 개시 당시 르완다 내에서는 3만여명이 AK-47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비무장인 후투족도 간단한 서류 작성 후에는 무기들을 공급 받을 수 있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장 캄반다는 르완다 국제 전범 재판소에서 당시 정부 각료회의에서도 투치족 말살론이 공공연히 논의되었다고 발혔는데 한 각료는 개인적으로도 투치족들을 말살시키는 데 찬성한다. 투치족이 없다면 르완다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없어질 것이다라는 주장을 했었다고 증언했다. 재판 당시 지방 정부 차원에서도 시장들과 경찰관들이 집단 학살에 대해 논의하고 또 그것을 이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5. 르완다 대학살 사건 발생

1994년 4월 6일, 하브자리마나 르완다 대통령과 시프리앵 은타랴미라 부룬디 대통령이 타고 가던 비행기가 키갈리에서 하강하던 중 격추되어 탑승개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다음날 르완다 대학살이 시작된다. 르완다의 정치 엘리트 집단인 군인과 경찰 그리고 민병대는 재빠르게 투치족 핵심 인사와 온건파 후투족 지도자들을 처형하고 검문소와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르완다 민족 식별 카드를 사용해 체계적으로 투치족을 살해했다. 또 후투족 민간인들에게 칼과 둔기 등의 무기로 무장하게 한 후 이웃 투치족들의 재산을 파괴하거나 빼앗고 폭행하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한다. 애국전선이 7월 중순경 수도 키갈리를 점령하면서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들의 대학살극은 끝나게 된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칼과 도끼등으로 살해되었다.


6. 피해

르완다 대학살이 자행되는 동안 발생한 수많은 성폭행으로 HIV 감염자가 급증했고 감염된 여성은 HIV에 감염된 아기를 출산하기도 했다. 수많은 고아와 과부가 발생했다. 기간시설의 파괴와 심각한 인구의 감소로 국가 경제는 마비되었다. 애국전선 주도의 정부가 출범하자 대학살을 자행한 많은 후투족들이 주변국으로 도주했고 자이르 현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에서는 르완다 국경 주변 난민 수용소에서 학살자들이 재결집하기 시작한다. 이에 애국전선 정부는 군대를 파견 자이르를 급습하기도 했는데 지금도 르완다 후투족과 투치족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7. 사건 후

르완다는 대학살 사건을 추모하기 위한 두 개의 공휴일이 있는데 4월 7일은 집단살해 추모일로 이 날부터 국가 추모 기간이 시작되어 7월 4일 지정된 해방 기념일에 끝난다. 4월 7일부터 일주일 간은 공식적인 애도 기간이다. 르완다 집단살해는 집단살해, 인권범죄, 전쟁범죄 등의 범죄자를 기소할 수 있는 법정인 국제형사재판소가 탄생하는 데에 자극제가 되었다.


8. 국제사회의 책임

유엔과 미국과 유럽 국가들 집단살해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르완다 지원단 평화유지군의 군사력과 권한을 강화하는 데에 실패해 대학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프랑스 정부는 대학살이 시작된 후 학살자들인 후투족 정부를 지원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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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카톨릭의 책임

이 사건에 대해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대학살 사건 당시 1994년까지 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가톨릭 국가로 인구의 68%가 로마 가톨릭 18%는 개신교 그리고 약 1%가 무슬림이었던 대표적인 기독교 국가였다. 문제는 로마 카톨릭이 식민지 시대에 투치족을 우대하며 식민지 행정 엘리트로 키우며 종족간 갈등을 일으키면서 식민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데에 있다. 특히 르완다를 지배했던 벨기에 식민 정부는 가톨릭 교회의 학교에 투치족의 추장들의 자녀를 입학시키며 엘리트 교육을 펼치며 투치족을 우대하면서 투치족이야말로 후투족보다 훨씬 우월하다며 인종 갈등을 불러 일으켜 르완다에서 투치와 후투족을 대립시켰다는 것이다. 이렇게 투치 족에게 핍박받던 후투족들이 투치 족에게 이를 갈았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후투족은 자신을 차별했던 로마가톨릭 교회를 통해 오히려 의식화 운동을 전개하게 되는 것도 아이러니다. 1957년 후투 사회 운동을 이끌었던 카이반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가톨릭 소유의 신문사 Kinyamateka의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인물로 카이반다는 신문을 이용해 후투와 투치의 갈등을 인종 간의 갈등 이라고 규정 외국인 투치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후투가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후투 의식화를 부추겼고 투치족을 공격할 것을 부추겼던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카이반다를 비핀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후투족에 가세하면서 후투족들의 대학살의 분위기를 조장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사건후 조사과정에서 대학살이 벌어지자 많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학살에 협조한 것으로 밝혀졌고 르완다 학살에 협조 한 일반 주민들 대부분이 '투치의 학살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한 것이다'고 여겼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들 가톨릭 성직자들은 하느님의 아들의 아니라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이비로 비판 받아야 한다.


10. 사과를 거부한 가톨릭

르완다에서 학살이 일어난 이후 교황청은 그들의 촘촘한 조직망을 이용해 학살 가담자들을 유럽으로 도피시켰다. 학살의 전범들은 바티칸의 국제자선단체기구인 카리타스 인터내셔널의 도움을 받아 유럽행 비행기표를 제공받아 유럽으로 탈출하였고, 학살에 참가한 신부들은 벨기에나 프랑스 교구로 파견하였고 주교들은 이러한 사실을 부인했다. 르완다 국제 전범 법정에서는 대학살에 관여한 가톨릭 사제 아타나제 세롬바(Athanase Seromba), 에마누엘 루쿤도(Emmanuel Rukundo) 등이 고발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 교회의 대량학살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했고 르완다 가톨릭 교단은 당시 학살에 연관된 가톨릭 관계자들은 개별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며 그동안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았다. 또 르완다 학살을 '민족 말살'이란 표현 대신에 '골육상쟁'이란 표현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의 지시로 시행된 르완다 대학살 사건 진상조사가 발표된 뒤에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1998년 4월 23일 르완다 공화국의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유감이나 사과의 내용은 없고 후투족 학살자들의 사형을 연기해 달라는 요청뿐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무척 실망한 대목이다.


11.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과

1994년 사건이 발생하고 23년이 지난 2017년 3월 20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 사도궁에서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을 만나 가톨릭 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이 저지른 죄와 결점에 대해 다시 신의 용서를 구한다고 밝혔다.

“일부 성직자가 학살에 가담함으로써 선교의 사명을 배신한 채 증오와 폭력에 굴복한 당시 사건은 가톨릭 교회의 얼굴을 손상시킨 일이었다. 르완다에서의 평화를 증진하고 학살의 기억을 정화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연합뉴스 참조)


12.마무리

르완다 대학살 사건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사건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정확하게 누구의 책임이며,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특히 벨기에란 나나와 가톨릭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다. 민족말살이었던 대학살 사건을 골육상쟁으로 축소해 그들만의 문제로 끝내려했던 가톨릭의 비겁함에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존경심도 갖고 있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사과를 거부했던 태도에 대해서는 무척 실망이 크다. 가톨릭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아주 큰 실수였다. 진실앞에 사죄를 하는데 더 좋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이 학살의 배경에는 제국주의가 있었다. 백인우월주의 또한 영향을 끼쳤다. 백인과 제국주의 그리고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이런 끔찍한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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