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위그노 전쟁과 낭트칙령 (Edict of Nantes) 의미 설명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인정한 낭트 칙령)

올드코난 2017. 4. 1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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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앙리 4세가 1598년 4월 13일 선포한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은 프랑스에서 개신교 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 조치로 카톨릭과 위그노 전쟁을 종식시킨다.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인정해준 대표적인 사례인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에 대해 알아보자.


1. 위그노의 등장

유럽의 중세는 암흑기였다. 종교와 정치가 하나가 되었을 때의 폐해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카톨릭이 지배하던 중세 유럽은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 카톨릭은 부패하고 민중들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이에 카톨릭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요구가 발생하고 루터와 칼뱅이 종교 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프랑스의 칼뱅주의 개신교도를 위그노(프랑스어: Huguenot)라고 불렀다. 


2. 위그노 전쟁 발발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치며 성장한 위그노는 가톨릭에게는 위협이 된다. 당시 유럽 대부분 국가들의 국교는 카톨릭이었고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톨릭과 위그노의 대립이 거세지고 1562년 프랑스 왕비이며 섭정이었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에 의해 상제르맹 칙령이 선포되었는데 위그노의 권리가 일부 인정되기는 했지만 만족할만한 내용은 아니었고 카톨릭은 위그노를 인정하는 것이 싫었다. 프랑스 정부는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양쪽에서 비판을 받게 되면서 갈등은 갈수록 커져가게 되고 결국 가톨릭 측이 위그노를 살해하기 시작하면서 위그노 전쟁이 시작된다.


3.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위기노 전쟁은 초기에 마무리 될수도 있었지만 장기전으로 가게 된 사건이 생긴다. 1570년 카톨릭과 위그노는 휴전을 맺고 위그노 교인 나바르 국왕 앙리와 가톨릭 교인 앙리 2세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사이의 결혼식을 치르기로 합의한다. 만일 이 결혼이 성사되었다면 위그노 전쟁은 이때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앙리 2세의 아내이자 신부의 어머니인 섭정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는 결혼식에 모여든 위그노를 한 번에 없애기로 결심하고 그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일으키고 만다. 신랑 앙리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억류되고 위그노 전쟁은 다시 시작된다. 위그노 전쟁은 큰 전쟁이 아닌 30년 동안 간헐적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전쟁으로, 프랑스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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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앙리 4세 즉위

1589년 앙리 3세가 암살당한다. 이에 위그노 전쟁은 왕위계승전의 양상을 보이면서 국제적인 사건이 되는데 이 시기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결별한 성공회의 영국은 위그노를 지지하고, 정통 카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은 가톨릭을 지지하는데, 이는 종교 문제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패권과도 연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위그노 전쟁은 프랑스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기에,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프랑스라는 점이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것은 프랑스 국민들은 물론 왕과 귀족들도 하고 있었지만 위그노와 카톨릭 진영은 누구도 양보를 하려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앙리 3세가 1589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도사에 의해 살해를 당하게 된다. 앙리 드 나바라가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를 하는데 그가 바로 선량왕 앙리(le bon roi Henri)로 잘 알려진 성군 앙리 4세였다. 앙리 4세 즉위로 프랑스는 부르봉 왕가 시대가 시작된다.


5. 앙리 4세의 카톨릭 개종

앙리 4세는 위그노였다. 이에 로마 가톨릭교회 연맹은 앙리 4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남부 지역은 카톨릭이 지배를 하게 되는 상황이 된다. 이에 앙리 4세는 대관식을 치르지 못하는 반쪽 왕이 되는데, 앙리 4세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1593년 “파리는 (종교를 바꿔서라도) 가질 가치가 충분하다(Paris vaut bien une messe)”는 선언과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이에 로마 가톨릭교회 연맹은 앙리 4세의 개종을 인정하고 앙리 4세를 왕으로 인정 1594년 2월 27일 샤르트르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게 된다.


6. 낭트 칙령과 위그노 전쟁 종식

하지만,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 위그노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랜 전쟁으로 갈등을 겪었으며, 존재 위협을 느끼던 카톨릭 교도들과 위그노 교도 모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앙리 4세는 1598년 4월 13일 낭트에서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을 선포하게 된다. 두 개의 공증된 문서로 작성되었는데 위그노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 준 것이다. 낭트 칙령의 선포로 위그노 전쟁은 끝을 맺게 된다.


7. 이후

절대왕정을 꿈꿨던 프랑스 루이 14세는 교황청의 지원을 받기 위해 가톨릭만을 국교로 인정 1685년 10월 18일 퐁텐블로 칙령을 내려 낭트 칙령을 폐지한다. 이에 많은 위그노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해외로 이주하게 되는데 위그노들은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이들이 프랑스를 떠나자 프랑스 경제에 악영향을 주게 된다. 이후 1787년 루이 16세가 관용 칙령을 선포하고 개신교도들이 다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게 된다.


8. 낭트칙령 의미

낭트 칙령이 종교적인 갈등을 완전히 해소된 것이 아니며 결국 앙리 4세가 암살되기도 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준 세계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낭트 칙령 내용에 파리를 제외한 지역에서 공공예배를 볼 수 있게 하고 그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허용하고 신교도와 구교도로 이루어진 특별법원(Chambre de lÉdit)을 만들어 이 칙령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분쟁을 해결하도록 하는 등, 종교로 인한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종을 하려든 정부의 노력이 돋보이는 조치였다. 훗날 태양왕 프랑스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하기 전까지 프랑스가 영국을 포함한 유럽국가들에 경제나 자유 등의 문제에 뒤쳐지지 않을 수 있던 주요한 이유가 된다. 낭트 칙령은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존중해줄 때 국가가 발전할 수 있으며, 반면 종교의 자유와 사랑의 자유 그리고 인권 등을 억압하는 국가는 절대 일류 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낭트 칙령은 훗날 프랑스대혁명 당시 인권선언과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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