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영국 최초의 성문헌법 옥스퍼드 조례 (Provisions of Oxford) 설명

올드코난 2016. 2. 12.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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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왕의 실정으로 마그나카르타가 만들어지는데 존왕의 아들 헨리3세 역시 군주로서는 자질이 부족했다. 이 두왕의 무능은 결국 영국 의회민주주의 시작이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는지. 잉글랜드 왕 헨리 3세가 귀족들이 재정적 지원을 약속한 대가로 1258년 받아들인 개혁안 옥스퍼드 조례에 대해 정리해 본다.

영국 최초의 성문헌법 옥스퍼드 조례 (Provisions of Oxford) 설명


1.무능한 헨리 3세

헨리 3세(Henry III, 1207년 10월 1일 ~ 1272년 11월 16일, 재위 1216년 10월 19일 ~ 1272년 11월 16일)는 존 왕의 아들로 9살에 왕이 되는데, 교양과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고는 하지만, 왕으로서의 자질은 부족했다. 외교나 군사 문제에서 결단력이 부족해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많아지자 귀족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귀족들은 헨리 3세에게 여러 번 요구를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는데 이유는 헨리 3세는 자신의 정책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실인식이 부족했던 것이다.


2.배경

1254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시칠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하려할때 헨리 3세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와 협약을 체결하는데 자신의 둘째 아들인 에드먼드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주는 대가로 교황이 시칠리아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 비용을 지원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헨리 3세는 4년이 지나도록 교황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화가 난 교황이 위협을 해 오자 다급해진 헨리 3세는 약속한 전쟁 비용을 내주기 위해 귀족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3.옥스퍼드 조례 작성

헨리3세는 1258년 봄 의회(부활절 의회 또는 '미친 의회')를 소집하는데, 이때 매제이기도한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프랑스인)이 귀족 7명을 대동해 궁전에 난입한다. 그리고 헨리3세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는 대신 왕권을 제한하는 ‘옥스포드 조례’를 작성하게 한다.

절반은 왕이 뽑고 나머지 절반은 귀족들로 구성된 24명의 왕실 위원회가 제출한 개혁안으로 귀족들이 서약하면서 승인이 된 ‘옥스포드 조례’는 12년 동안 효력을 지녔고 이를 통해 개혁을 성취할 수 있는 기구가 구성되었다.


4.주요 내용

정부는 왕과 15명으로 구성된 귀족 위원회의 공동 지도 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모든 중요한 사항에 대해 왕에게 조언을 할 수 있었다. 왕국의 모든 고위 관리들은 왕과 이 위원회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의회는 1년에 3차례 소집되어 앞으로의 개혁을 협의했다.


5. 의미

이 조례는 1261년과 1262년 교황의 칙서에 의해 취소되었다가 1263년 귀족들의 활동으로 복원되었고, 다시 1264년 1월 아미앵 협정으로 프랑스 왕 루이 9세에 의해 수정·복원되었지만 1266년 10월 케닐워스 선언에 의해 취소되었다.

이전에 만들어진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영국 최초의 성문헌법(constitution)이며 이후 영국 최초의 의회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조례로 그 가치는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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